팀문화와 리더십에 대하여

후기: [경영과 사람 사이]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 반대했다: 도전적 폴로어의 중요성

우리 팀에서 늘, 자주 강조하는 것: “팀장의 얘기가 곧 정답이 아니다”

1.
합리적 결과를 찾기 위해 생각을 구체화하여 전달하려고 노력하다보면, 팀원 입장에서는 팀장의 말을 수용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듯 하다.

사안에 대한 의견이 명확하게 서 있지 않은 경우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경우도 있지만, 뭔가 찝찝하고 완전히 동의하지 않음에도 한국인의 정서상 리더의 생각에 반하는 의견을 낸다는 것에는 아무래도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2.
그렇다고 팀장이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 의견 교환 자체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딜레마는 어쩌면 한국 교육방식의 문제가 원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거대담론은 현실에선 사치일 뿐. 팀원들의 의견을 자연스럽게 끌어내면서도 명확하고 날카로운 토론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해내지 못한다면 팀장의 설교나 꼰대질로 점철되기 십상이다.

3.
1번과 2번은 마치 젓가락 위에 올린 구슬과도 같아서, 그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합리적 결론을 찾아가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심지어는 합리적 결과가 아님을 모르는 경우마저 발생할 수 있다 (팀장이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맹신하게 되거나, 팀원의 의견을 ‘따라가주느라’ 먼 길을 돌아가게 되거나).

4.
이런 균형은 미팅 때 절대로 “의견들 내세요” 한다고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오히려 입을 다물게 된다), 평소의 팀 문화가 그 성패를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팀원들을 부하직원이 아닌 전문가로, 동료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며, 단지 그렇게 ‘대해주는’ 것은 팀원들이 먼저 알아차릴 수 밖에 없다.

결국 팀장이 팀원들을 평소에 어떻게 인식하는가, 즉 ‘신뢰의 문제’이며, 신뢰란 쌍방의 인식이니만큼 팀원들 스스로의 인식 전환 노력도 중요하다.

쌍방 간의 신뢰를 쌓아가기 위해 팀장의 인식을 팀원들에게 지속적으로 전달하려는 노력도 어느정도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비판을 주저하고 순응에 더 익숙한 문화에서는), 이마저도 꼰대질(행동은 그렇지 않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한)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5.
올해 하반기 시작과 함께 팀원들과 1 on 1 을 진행하면서 그간 좋았던 점/아쉬웠던 점/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을 질문했는데, 다행스럽고 감사하게도 모두 공통적으로 자유로운 의견공유가 가능한 팀문화를 장점으로 꼽아 주었다. 그 장점을 성과와 성취감으로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부담은 있지만, 힘든 시기일수록 확실히 팀문화가 중요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 같다.

‘인권’ 개념은 어디서 출발한걸까?

산책 중에 유튜브를 보다가, 그간 잡다하게 쌓여있던 생각이 떠올라 다시 잊어버릴까 싶어 페이스북에 마구 써내려갔다.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블로그 포스팅으로 시작했을텐데, 밤길에 길거리에 서서 작은 화면 들여다보느라 눈이 빠지는 줄.

퇴고도 하지 않은 채 공유해버린 글이라 잘 정리되지 않았을 수 있으나,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내 생각을 조금씩 정립해가는 과정이리라. 이 정도로 만족하자. 다음 기회가 또 있겠지.

소셜미디어에 타임라인에 그냥 흘려보내기보다는 ‘써노로그’에 log 로 남겨둬야겠다.

회사 또는 직업의 선택에 대해

감사하게도

최근 여러경로를 통해 이직을 제안받고 있다. 물론 그 중 상당수는 헤드헌터들로부터 받는 무의미한 찔러보기들이지만, 가끔씩은 며칠을 고심하게 만드는 솔깃한 제안들도 있다.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현직장에서 해보고 싶은 일들을 아직 충분히 성취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탓에 이직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지는 않으나, 기회라는 녀석이 늘 내 상황 봐가며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보니 (인생은 타이밍..) 최소한 검토까지는 시도해보는 편이다.

그러나 최근 몇 번의 제안들을 검토해보면서 자신만의 기준을 충분히 세워두지 않으면 고민만 길어질 뿐 좋은 선택(stay or move)을 하기 어렵겠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 생각을 정리해두고자 한다 (‘써노로그’니까. 내 자신을 위해 남겨두는 기록으로서).

‘좋은 선택’이란

최근의 경험을 돌이켜보자면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이러이러한 것이 좋아질 것 같다. 그러니 시도해 볼만 해’라는 생각에 갖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사고의 흐름에서 처음에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문제를 발견했다. 내가 기회들을 검토하고 선택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나도 모르게 기회란 녀석이 나를 검토하도록 방치하고 있었던 것.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열정을 가질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실현하려는 노력보다는, 누군가(이직 제안자)의 니즈를 마냥 기다리고만 있었던 매우 수동적인 자세에 머물러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극구 부인하고 싶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냉정하게 평가해보면 충분한 적극성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알게 모르게 나 자신을 ‘직장인’의 범주에 머물게 만들고, ‘(직장인) 커리어 패스’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의 열정을 실현하고 행복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법인과 계약을 맺고 있을 뿐임을 상기해보면, 자신을 1인 기업가로 인식하는 것이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출발이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좋은 선택’의 기준은 직책(권한의 확장, 회사를 등 뒤에 엎었을 뿐인 허구적 개인 브랜드), 연봉 따위가 아니라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 ‘나는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은가’

그 흔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평생을 찾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문제이니만큼,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이런 질문들을 해보기로 했다.

  • 가슴이 뛰는 일인가: ″설탕물이나 팔며 인생을 마칠 것인가” – 스티브 잡스
  • 글로벌한 기회가 있는가: 흔적을 남기는 일을 우리나라로 제한해야 할 이유가 없다

1인 기업가로 살아가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기준은 이직/창업/직종전환 등 어떤 경우든 무관하게, 결국 그 회사의 주식을 사고 싶은지 (가치 투자 관점) 또는 지분을 인수하고 싶은지의 기준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1인 기업가로서 그 법인과 동업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면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르겠다.

위에 언급했던 스티브잡스의 설탕물 일화는 매우 유명하지만 아쉽게도 영상이 남아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첨부한 영상은 기술을 개발해놓고 시장에 팔 궁리를 하기 보다는 고객경험에서 출발하여 기술개발에 도달해야 한다는 잡스옹의 발언이다. 이를 지금의 고민에 접목해보자면 내가 가진 기술이나 지식을 앞세우기보다는 1인 기업가로서 내 고객들에게(또는 세상에) 어떤 혜택을 제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 즉, 이 원칙은 다음 회사나 직업을 선택할 때의 방향성과도 정확하게 맞닿아 있다.

기준을 이렇게 정리하면서 그간 복잡했던 생각이 상당부분 해소되었는데, 가장 큰 소득 중 하나는 기회를 놓칠 것 같은 조급함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좋은 기회가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장했을 때 좋은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면, 기회에 대한 조급함 보다는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길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어떤 열정을 가져야 할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에 먼저 집중해야 맞다.

또 다시 상황에 매몰되어 조급함을 갖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면 이 글을 다시 곱씹어봐야겠다. 그리고 나중엔 더 숙성되고 경험에서 우러나온 로그를 남기게 될 날이 오기를.

‘차별금지법 반대’에 반대하며 (6/6)

동성애 문제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

그래서 이 문제를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일단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동성애(LGBTQ+를 모두 포함하여) 자체는 반대해야 하나 동성애자들을 차별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말은 쉽지만 현실적 적용에서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최근 현안으로서는 차별금지법을 찬성할 것인가 혹은 반대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가 대표적이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 또는 처벌될 것이라는 주장은, 현재 상정된 법안 문구대로라면 그렇지 않다는 해석이 더 타당하므로 적절한 주장은 아니다. 또한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 내에서도 성소수자들이 ‘인간으로서’ 차별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통과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과, 이 법안은 비성경적 관점을 합법화하고 점차 교회를 억압하는 전초일 뿐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 같다.

법이란 것이 사회의 인식과 합의를 반영하기도 하고, 반대로 제정된 법이 교육적 효과로서 영향을 주기도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차별금지법의 통과가 당장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중장기적 관점에서 (성경적으로) 우려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리 간단치만은 않은 것이, 사회적으로 소외되어왔던 여성이나 장애인들의 인권 문제와 마찬가지로 성소수자들에 대한 현실적 차별문제 개선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법적 장치가 필요한 부분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성애 찬성 문제를 떠나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혹은 차별받지 않아야 할 권리에 대한 것이며 현재 차별금지법 발의는 이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외국 사례를 들어 차별금지법의 이후 발전(?) 수순은 교회에 대한 역차별로 이어질 것이 자명할 것이라는 교회의 염려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볼 수는 없으나 현재 차별금지법 수준의 장치를 반대할 논리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동성결혼 합법화와 같은 문제야말로 합의점을 찾기 쉽지 않은 것인데, 성경적으로는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답하는 것이 옳으나, 이 대답은 곧바로 LGBTQ+와 찬성론자들에게 차별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즉, ‘차별’의 범위에 대한 인식이 매우 다르다. LGBTQ+와 찬성론자들에게는 단순하게 채용, 교육, 승진, 임금 등의 차별을 받지 않는 것을 넘어 성 정체성과 성 지향성 자체를 인정받는 것 자체가 권리이며 이를 침해받는 것은 모두 차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법적 문제에 대해 교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개인적으로는 차별금지법 자체를 반대할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의 성경적 교육이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도록 하는 보완 법안 상정이라던가, 관련 교육 콘텐츠 개발 등이 더 온건하면서도 적극적인 대응이 아닌가 싶다. 지금과 같은 자극적 대응은 ‘교회의 죄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동성애 문제만 들고 일어나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내는 보수꼴통’으로 인식되는 역효과만 불러올 뿐,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은혜입은 죄인’으로서 진리를 따르고 전파하는 것이지, 세상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차별금지법도 통과되고 교회의 입장은 더 고립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들을 ‘사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필자의 관점에서는 적어도 ‘뱀처럼 지혜로운(마 10:16)’ 방안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필자가 차별금지법에 잠재된 향후 문제 가능성에 대해서는 염려하면서도, 교회의 차별금지법 반대운동에 긍정적이기 어려운 이유다.


‘차별금지법 반대’에 반대하며

1) 민감한 주제의 글을 시작하며
2) ‘행위’에 초점을 맞춘, 그 부실한 근거
3) 우리는 ‘은혜입은 죄인’이다
4) ‘죄성’에 대하여
5) 성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리고 교육의 문제
6) 동성애 문제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

‘차별금지법 반대’에 반대하며 (5/6)

성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리고 교육의 문제

그럼에도 남아있는 문제가 있다. 바로 이미 성 정체성과 지향성의 혼란을 겪고 있거나 이미 성 정체성과 성 지향성에 대한 결론을 내린 사람들이 스스로 진단해야 할 문제, 즉 ‘내가 이 문제의 당사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과 이들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먼저 성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스스로를 남성으로 혹은 여성으로, 혹은 심지어 무성(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경우)으로 여기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체성의 문제조차도 ‘성(性)’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 인간에게는 왜 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성은 왜 하필 따로 존재할까? 오직 번식이나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한 몸에 있어도 되는 것 아닐까? 실제로 이런 류의 질문은 생물학적 또는 사회적으로도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결론을 내리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한가지로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설계(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비기독교인들이 볼 때 이 대답은 매우 무책임하고도 비과학적으로 들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해석하기 힘든 문제를 초자연적 영역으로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자연을 연구하면 할 수록 세상이 우연히 생성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 개입으로 정교하게 설계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의 과학적 접근은, 종교와 과학은 배척관계에 있다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이끌어낸다. 천문학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잘 알려진 케플러는 당대 종교적 세계관으로 주장된 천동설을 무책임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려는 자세로(널리 알려진 그의 언행에서 명백하게 밝히고 있듯이) 지동설을 과학적으로 검증함으로써 근대 과학의 토대를 놓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요컨대, ‘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는 전제가 단순히 맹신에 의한 주장이 아니라,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현실을 인정하는 겸손이며, 그렇기에 세상(여기서는 성의 문제)을 바라보는 틀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성 정체성’을 논의하는 맥락 자체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성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닌 누군가의(하나님) 설계 하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연히 생겨난 것이고 내가 마음대로 선택 가능한 자아의 문제라면 성 정체성을 찾을 이유조차 없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셨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며, 이는 내가 나를 어떻게 인식하던지간에 남성 또는 여성으로 태어나도록 설계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나의 성 정체성을 생물학적 성과 다르게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성 역할에 대한 선호(예: ‘나는 남자로 인정받고 싶어’) 또는 거부감(예: ‘내가 왜 남자로 여겨져야 하지?’)을 현실에 반영하려는 시도일 뿐, 그 인식이 실체적이이지는 않다는 뜻이다. 이런 면에서 성 정체성이 개인의 선호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 볼 때는 논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으며 현실적이지도 않다.

그러면 성 지향성은 어떨까? 이 또한 성경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룰 것’을 말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음을 밝히고 있고, 이성에게 끌리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성경에 기반하지 않은 성 지향성과 관련한 주장은 개인의 성 정체성과 무관하게 어떤 성에게 끌리는가의 문제는 개인적 선호일 뿐이라는 것이며, 이는 성 정체성에 관해 설명한 앞선 논리와 동일한 맥락에서 성경적으로는 타당하지 않다.

자신의 성 정체성과 지향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라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특히 자아가 형성되어 가는 청소년기에 동성과의 가까운 감정을 사랑(‘사랑’이 무엇인가의 논의는 이 자체로 방대한 주제이니 여기서 다루기 어렵지만, 청소년기의 감정이란 일반적으로 꽤나 열정적이니만큼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으로 인식하여 본인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던가 하는 등의 문제이다. 어떤 교육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 정체성을 성인이 된 이후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던가, 일부는 상황에 따라서 성 정체성을 바꿔도 된다고 교육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교육이 오히려 성 정체성 또는 지향성의 혼란을 겪지 않던 청소년들마저 고민하도록 만들고 있다(이런 교육의 목적 자체가 자신의 성을 주어진대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이런 결과는 당연한 듯 보인다).

특히 필자가 가르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이런 문제들이 꽤나 우려스럽다. 모든 청소년들을 만나본 것도 아니고 설문을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이런 현실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갈리는 것 같다. 이 사안을 깊이 사색해 보지 않은 그들로서는, 동성애자들을 무조건적으로 혐오하게 되거나 교회를 거부하게 되는 두 극단으로 빠지는 경우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차별금지법 반대’에 반대하며

1) 민감한 주제의 글을 시작하며
2) ‘행위’에 초점을 맞춘, 그 부실한 근거
3) 우리는 ‘은혜입은 죄인’이다
4) ‘죄성’에 대하여
5) 성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리고 교육의 문제
6) 동성애 문제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