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문우당 방문기

이번 여름, 교회 수련회를 참석하면서 속초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다들 해수욕을 즐기는 중에 나는 물놀이에 관심이 없어 카페에 있으려 했으나, 교회 동생의 추천으로 서점에 들르기로 했다. 카페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것 보다야 좀 더 나은 선택이지 않을까 했던 생각은, 며칠이 지난 지금도 여운이 남아 있을 정도로 여지없이 무너졌다.

문우당 입구 – “책과 사람의 공간”. 뭔가 입구부터 심상치 않다.
응? 왠 제비의 편지?

입구에 들어서려는데 왠 제비가 말을 건다. 호기심에 읽어보니 제비가 집을 지었단다. 응? 제비? 가만.. 지금까지 살면서 제비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위쪽을 보니 제비가 앉아 있다! 제비집까지…? 나중에 물어보니 가끔 새끼들이 비행연습도 한다고 한다.

저 제비들이 주로 앉아있는 위치가 저기인 탓인지, 바로 밑 주차장 아스팔트는 싸질러 놓은 오물로 오염되어 있고, 제비편지를 보니 주차된 차에도 자주 실례를 하는 모양이다. 이 서점은 이 자그마한 침입자들을 제비부부의 편지라는 감성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승화시켜버렸다. 만일 서울의 일반적인 서점이었다면 어땠을까? 제비가 보이지도 않았겠지만, 당장 쫓아버리지 않았을까.

심상치 않은 서점 입구 인테리어와 제비 감성에 비해, 1층은 통상적인 서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그런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눈길을 끈다.

계단에는 온갖 책에서 발췌한 문구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계단 중간에는 ‘숨터’라는 쉬어가도 좋다는 공간이 작게 마련되어 있다. 물론 정말로 앉아서 쉬기에는 뭔가 애매한 위치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문구들을 하나하나 음미하게 만들고 책을 파는 곳이라기보다는 ‘머무름’을 종용하는 느낌이 마치 전시회에 입장한 관람객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당도한 2층도 겉보기에는 크게 다르지 않다. 뭔가 열심히 들여다보고 계신 사장님의 ‘어서오세요’ 하시는 인사를 시큰둥하게 지나치고는 천천히 책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상당한 수의 독립출판물들이 정렬되어 있었는데 (사실 돌이켜보면 독립출판물들을 실물로 만져본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책 표지마다 추천편지가 클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에이, 추천사나 일부 글을 발췌했겠지’ 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하나하나 읽어보고 정성스런 수기로 작성된 내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서점에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표지도 열어보지 못한 집에 쌓인 책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계산대로 향하려는 발을 멈춰세워야만 하는 갈등을 겪게 되는 법. 이 때 취할 수 있는 이성적인 선택은 일단 사진을 찍어두고 나중에 온라인으로 구매하는 방법이다. 게다가 나는 G마켓/옥션에서 임직원 쿠폰까지 적용해서 살 수 있잖은가.

그런데 같이 간 동생이 책을 구매하려는데 차에 지갑을 놓고 와서 나중에 입금할테니 카드를 빌려달란다. 잠시 후 카드결제 알림이 떴는데, 계산대로 와보란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가보니 인상 좋으신 사모님(?)께서 계산대 위에 전시된 문구목록 중에 하나를 고르라신다. 스티커와 책갈피 등이 담긴 선물을 그 문구와 함께 선물해주시겠다는 것.

책을 사지 않더라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선물하신단다. 이 때부터였다. 서점에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하하. 어찌보면 작은 친절에 마음이 열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됐는데, 원래 속초에서 5평으로 시작했다 하신다. 서울에서 시작한 서점이 속초 분점을 내어 운영하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팬시하고 곳곳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적인 느낌과 감성이 묻어있는 공간이었는데, 토박이 서점이었다니. 지금 그 건물은 원래 중학교 운동장이 있던 터였다고.

요샌 오프라인 서점 운영하기 만만치 않은데, 게다가 수도권도 아니고 속초인데 (인구가 9만명도 안되는) 괜찮으시냐고, 잘 운영되었으면 좋겠다 말씀드리니 돈 벌려면 서점은 하면 안된다 하시면서도 계속 찾아주시는 고객들이 있다 하시는 걸 보면 이 공간에 나만 감동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부부가 운영하고 계신데 그 따님이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라 곳곳에 신경을 많이 썼단다. 독립출판물의 서평들, 인상적인 문구와 발췌글들도 그의 아이디어. 1층에는 팝업스토어도 열고 있다.

정말 인상적인 점은, 이런 소품들의 판매가 대형서점에서 파는 상품들처럼 장사하는 느낌 아닌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의미를 담은 소품으로 보이게 만드는 능력이다. 공간과 스토리텔링의 힘 아닐까.

결국 사진만 찍고 슬그머니 내려둔 책을 다시 집어오고야 말았다. 이런 곳을 소개해 준 동생에게 고마워 아까 결제했던 책값은 받지 않기로 하고, 지인에게 선물할 책까지 함께 사고야 만든다.

이번에는 선물드릴 분을 위한 문구를 선택했다. “견뎌내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그렇게. 우리답게 건강한 생각과 마음을 지키고 살았으면 좋겠어. 응원할게”.

책에 감동을 느낄 수는 있어도, 서점에 감동을 느낀 적은 처음이다.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또 들러봐야겠다. 아니, 사색할 일이 있다면 일부러라도 찾아 볼만한 공간이다. 공간이 주는 느낌에 걸맞게 역시나 상업적이지 않은 느낌의 독립출판물들이 주는 매력도 그 가치를 더 해준다.

영수증마저 정성스럽다 (고 느끼게 만드는 최면에 걸린 걸지도 모른다)

IF2018 후기

D.CAMP 주관하여 신촌에서 열린 IF2018에서 긴 시간을 들여 부스를 하나하나 모조리 방문하면서 챙겨온 것들을 살펴보면서, 기억에 남았던 스타트업들을 메모해보기로 했다. 

떠헉.. 이거 언제 다 살펴보나 🤪

‘사람을 연결하다’

놀담

사람(시터)과 사람(아이들. 사실은 아이들 부모이겠지만)을 연결하는 서비스.
연결을 중개하는 것 뿐 아니라 시터와 아이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도구와 프로그램들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나저나 회사 이름이 매우 인상적이다:  (주) 잘노는 ㅋㅋ

로톡, 마인드아트

법률 상담을 위허 변호사를 매칭해주는 서비스 로톡, 전문상담가를 매칭해주는 서비스 마인드아트. 사용자 입장에서는 전문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정보를 찾기 어렵고, 결국 전문가들조차도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 같다.

여행의 직구

주변에 외국 여행가는 사람이 있으면 한 번쯤은 뭐 좀 사다 달라고 부탁해 본 적이 있을 터. 이 불편을 아예 플랫폼화 해버린 서비스다. 최근 쿠팡에서 실험 중인 쿠팡 플렉스가 생각났다. 전문 서비스가 아닌, 개인을 통한 니즈 해결과 수익 창출 모델. 

팬심

1인 미디어, MCN 등의 영향력을 새삼 다시 생각하게 만든 서비스 아이디어. 1인 디지털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이미 셀럽인 경우는 워낙 많지만, 이들에 대한 팬덤이 사업화 될 정도라니. 이들에게 선물을 보내는 일을 대행해주는 서비스.

‘상생이란 무엇인가’

스타트업과 대기업은 어떻게 상생해야 할지, 서로 간에 얻을 수 있는 시너지는 없을지 고민하게 만든 업체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까?

투모런스 / 핏코

제공되는 명함 타입의 측정 보조도구과 상하의를 함께 촬영하면 크기를 정확하게 측정해주고 이를 서비스에 등록하면, 핏코 서비스앱에 연동된 쇼핑몰에서는 해당 크기의 사이즈 옵션을 자동으로 선택해준다. 

명함타입의 보조도구가 아니라 아예 3D 스캐너를 통해 측정하는 것도 가능한데, B2C 서비스 핏코앱의 완성도를 다듬는 것도 상당한 작업일텐데 B2B 사업이어야 할 장비까지.. 아직은 BM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은 느낌. 

서비스앱에 연동된 쇼핑몰이 아직은 없다보니 옵션 선택 UI는 핏코앱에서만 동작하기 때문에 실제 쇼핑을 위해서는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해당 쇼핑몰에 재방문해야 하는 불편이 있다.

바다볼래

스티치픽스와 유사한 의류 추천 모델이나, 여행룩을 타겟으로 한다. 국내 쇼핑몰 상품들과 상품평을 크롤링하여(G마켓/옥션도?ㅋㅋ) 분석하고, 본인 취향이나 방문하고자 하는 여행지에 잘 어울리는 의류를 추천하여 발송해 준다. 왜 여행 분야로 한정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긴 한다.

다르개

반려견 용품을 제작 판매한다. 유기견 지원이 사업의 모티베이션이어서인지 업사이클링이라는 사회적 주제를 함께 결합하고 있다.  쇼핑몰 입점도 원하는 것 같은데.. 여전히 뭔가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걸까?

에벤에셀케이 (이미지프레소/비디오프레소)

사람 눈으로는 인식하기 힘든 컬러값을 동일하게 맞춰서 압축률을 높이는 기술을 서비스화했다. 기술 장벽이 높지는 않아서인지, 특허 보유 여부에 대한 질문에 바로 그렇다는 답변을 주신다. 

로로젬

쥬얼리를 AR로 착용해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상품 자체는 3D 모델이 아닌 AR 스티커에 가깝다. Virtual fitting을 비교적 빨리 사업화했고, 쥬얼리 분야에 특화하여 여러 브랜드를 입점시켰다는 점에서 실행력이 있는 업체인 듯 하다. 다만 다양한 AR앱이 막 쏟아져 나오는 시기에 얼마만큼 경쟁력을 갖추어 나갈 수 있을지.. 대기업들과 협업 또는 공정한 경쟁이 가능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DIY’

STACKUP 

휴대용 보틀의 사이즈를 블록 사이즈로 조절 가능하게 만든 재미난 아이디어. 연결했을 때 내용물이 새지 않도록 각 블록마다 고무패킹을 해두었다. 그런데.. ‘스택업’이 맞는 것 같은데 왜 ‘스텍업’이라고 쓸까.. 괜히 신경쓰인다 ㅋㅋ

LUXROBO (MODI)

종이재질로 제공되는 도안과 배터리, 버튼, 부저 등 각종 입출력 모듈들을 연결하여 조립하여 다양한 인터랙티브 작품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스마트폰과 블루투스 연결이 가능한 모듈도 있고, 간단한 코딩으로 동작을 제어할 수도 있는 등 아이가 있다면 함께 한다는 핑계로 만지작 거려보고 싶은 제품.
(그런데 왜 대체 진열된 킷트를 훔쳐가는 사람이 있는 건지 이해불가.. 노상에 열리는 무료 행사는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가..)

미스터 공간

이제 집의 공간도 렌탈로 꾸미는 시대? 월 4~8만원대의 가구/인테리어 소품들을 대여하여 공간을 꾸밀 수 있는 서비스. 싫증나면 다른 가구로 바꿔서 지낼 수 있으니 활용 관점에 따라 비용측면에서 괜찮을 듯도 싶다. 이런 사업은 가구 재고 관리가 매우 중요한 영역일 듯 한데, 그렇지 않은 사업이 어디있겠느냐만서도 여러가지로 고생이 많으실 듯 하다. 문득, 이사를 하게 되면 새 주소로 다시 렌탈하면 이삿짐이 많이 줄어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데이터’

Formakers (포메스)

게임 추천계 왓챠 느낌. 왓챠처럼 별점을 받는 것이 아닌 스마트폰으로부터 데이터를 획득하는 방식. 다만, iOS의 경우 Game Center 데이터 획득이 불가능하여 안드로이드만 가능하다는 한계는 있다. 현재는 비즈니스모델이 올려져 있지는 않으나 데이터를 확보한 이후 본격적인 사업으로 확대될 듯 하다. 왓챠나 리멤버의 경우와 같이 ‘데이터’를 축적하는 초기모델인데.. 게임 평가 데이터의 가치는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에필로그

이 외에도 너무나 많은 업체/기관들(IF2018 홈페이지 참조)이 애쓰고 계셨는데, 다 기록할 수 없어 아쉽다. 척박한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저마다의 영역에서 승부를 던지는 야생적 모습들은 늘 도전이 된다. 스타트업 특유의 에너지나 다양한 아이디어들로,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인 자극을 받을 수 있었던 의미있는 행사.

#스타트업이_장난이야? #놀러_왔어?
#스타트업_하고_앉아있네
#나는_왜_이_일을_하는가

가오 떨어지는 팀장

신임팀장이 된 이후로 팀장으로서 참석해야 할 회의 뿐 아니라 실무 회의에도 열심히 쫓아다니다보니.. 오늘은 급기야 팀장으로서 그런 회의까지 쫓아다니면 가오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들어버렸다.

물론 팀장이 참석하는 것이 상대측에 부담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팀원분 들에게 업무를 위임하는데 지장을 줄 수도 있을테고, 무엇보다 팀장업무만 해도 산더미인데 일일이 쫓아다니는 것이 당연히 효율적이지만은 않다.

그러나 아직은 이커머스에 대해, 또 실무적 지식에 대해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학습하려는 나만의 방식이다.

무엇보다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고 쓸데없는 가오 내세우며 아는 척 하고 앉아있는 것보다 더 가오 떨어지는 일은 없으며, 그 놈의 가오 챙기겠다고 버티는 힘이야 말로 꼰대의 길로 직행하는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안다고 생각한 것도 실상은 제대로 모르고 의도치 않게 아는 척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한데, 모르는 것을 어찌 안다 할 수 있으며, 모르면서 어떻게 큰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다 잘 알고 능력이 출중해서 팀장이 된 것이 아니라 팀장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졌을 뿐일진대, 배움에 대상과 장소가 어디 있다 말인가. 우려의 마음은 고마우나, 앞으로도 더 열심히 힘 닿는데까지 팀원에게 배우는 가오 떨어지는 팀장이 될 생각이다.

그리고 더더욱 팀장을 가오 떨어지게 만들어 주실 팀원분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소망이다.



데이터 분석 전문가라는 오해

오해

현 직장인 이베이코리아에서 AI팀 팀장을 맡게 되면서 가끔 주변으로부터 나의 전문성에 대한 섣부른 추측 또는 기대/시선을 받는 경우들이 종종 생기기 시작했다.

일반인들도, 심지어 인공지능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AI 기술을 딥러닝과 거의 등가 수준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고, 딥러닝 기술이 하루 아침에 생겨난 기술이 아니라 그 기반에 기존의 머신러닝 기법 / 선형대수 / 통계 등이 뒷받침하고 있다보니, AI 팀장이라는 사람에게는 이 모든 이미지가 오버랩되어 엄청난 데이터분석, 머신러닝, 딥러닝 전문가로 귀결되는 모양이다. R이나 파이썬에 능숙한 것으로 보이는 이미지는 덤.

그러나 실상 그렇지 않음은, 내가 참여했던 데이터분석이나 딥러닝 등 스터디 등에서 주구장창 퍼붓는 질문세례 등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개인적으로는 혼자 조용히 공부하는 것보다도 반복적인 질문과 발언/토론을 통해서 얻는 것이 더 많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무지를 드러내는 편이다보니 더 그러한 것 같다.

현실

내 연구/실무 경험의 중심에는 구글의 지식그래프, 위키피디아를 구조화한 디비피디아 등으로 대표되는 시맨틱 기술(Semantic Technology)이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지식표현(Knowledge Representation)과 이를 기반으로 한 추론기술 영역이다. 인공지능 기술에서 여전히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최근 인공지능 연구나 상용화 사례에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거나 그 중요성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보니 채용이나 이직 시장에서 소위 ‘잘 나가는’ 전문성은 아니란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게다가 이런 현실 탓에 이 기술에 대한 전문성을 스스로 갈고 닦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보니, 이마저도 무뎌지고 있어 이 분야의 전문가라는 정체성을 내세우기 무색한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적 호기심도, 욕심도 많다보니 어설프나마 이것저것 공부한 덕에 이것저것 떠들어대다 보니(외부발표, 기고/저술 활동 등) 그럴듯해 보일 수는 있으나 진짜 전문가 앞에서는 터무니없는 수준임에도, 어느샌가 전문가라는 딱지가 하나둘씩 붙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부담스러움이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지만, 여러 방향에서 들이치는 기술변화의 급물살들을 막아내기란 현실적으로 녹록치 않았다.

정체성

AI팀 팀장으로 발령되고 세 달이 흐르면서 깨닫게 된 것은, 나의 장점이 특정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스스로 잘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과 흥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1. 집요한 근본적 문제/해결과제 정의 (현업부서 관점)
  2.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기술요소와 접근법 도출 (기술부서 관점)
  3. 늘 해오던 방식이 아닌, 새롭고 창의적인 해결방안 제시 (문제해결 효율성, 사업적 관점)
  4. 이를 성취해 내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어쩌면 일찌기 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기술 전문가’로 성장하고 싶다는 어설픈 욕심과, 이직 시장에서는 위와 같은 장점들은 객관적으로 어필하기 쉽지 않다는 현실이 스스로를 가로막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뭔가 ‘AI팀 팀장’이라고 하면 엄청난 기술 전문가여야만 할 것 같은, 스스로 짊어진 편견은 내려놓고 내가 가진 역량을 더 갈고 닦아야겠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내게 팀장으로서 기대되는 역할이기도 할터다.

그럼에도

명함에 관리자 타이틀 올려두었다는 이유로, 비전문가들만 찾아다니며 입전문가가 되는 길은 절대 사양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적극적으로 무지를 드러내는 일은 내 스스로를 위해서도, 또한 더 많은 전문가들과 함께 세상에 위대한 흔적을 남기 위해서도 중요한 인생의 전략이다.



남북 정상회담과 하나님의 섭리 #2

이번 정상회담으로 적화통일이 된다는 둥, 전쟁이 난다는 둥 하나님이 경고하신다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는 과거 보수/진보 정권 할 것 없이 그 시기에 그들의 방식이 필요했고, 지금의 진행 방식 또한 지금의 세계 정세에 비추어 필요한 방식이라 생각한다. 모든 상황들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지금의 결과가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다. 김대중 정권 이후로 계속 햇빛정책만 고수했다면 지금의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이명박 정권 이후로 계속해서 강경쟁책만 고수했다면 지금의 국면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이번 정상회담이 그들에게 속는 것일 뿐 오히려 위협이 되어 돌아올 것이며, 이 결과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이라는 식의 발언에 대해서는, 반대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일하신 결과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 설명할텐가? 왜 그들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음성을 따라 사는 것이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방식이 그들의 생각처럼 한가지 방식만을 고집하시는 단순무식한 분이라 믿는 것인가?

하나님이 선악에 있어서는 타협이 없으신 분인데 무슨 소리냐라고 강변한다면, 당연하다.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시다. 악에 대해서는 일말의 타협도 없으신 공의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악을 허용하고 계시며 되려 선으로 바꾸셔서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스케일을 모른다면, 십자가 사건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예전에 감히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방식에 ‘신학’이라는 단어를 들먹였다는 이유만으로 배도한 자 취급을 받고 나와의 모든 연결을 끊어버린 친구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해주었던 말이 있다.

‘하나님의 음성 듣는 삶과 그 방식에 대해 처음부터 제고해보기를 권한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잘 살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 절대 아니다. 적어도 내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며, 내가 들은 음성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음성이나 예언을 나눌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이 아니라, ‘나에게는 이런 마음을 주시는 것 같다’ 정도의 표현이 나 스스로를 교만하지 않게 만드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과격한 단어를 섞어 목에 핏대를 올려가며 비난조의 주장을 펴는 ‘안맞으면 말고’ 식의 ‘예언’이, 나중에는 그들의 경고와 기도로 인해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셔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합리화로 변질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은 ‘내가 틀렸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겸손을 갖추고 있을까. 반대로 나도 만일 그들의 주장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나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