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반대’에 반대하며 (6/6)

동성애 문제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

그래서 이 문제를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일단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동성애(LGBTQ+를 모두 포함하여) 자체는 반대해야 하나 동성애자들을 차별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말은 쉽지만 현실적 적용에서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최근 현안으로서는 차별금지법을 찬성할 것인가 혹은 반대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가 대표적이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를 죄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 또는 처벌될 것이라는 주장은, 현재 상정된 법안 문구대로라면 그렇지 않다는 해석이 더 타당하므로 적절한 주장은 아니다. 또한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 내에서도 성소수자들이 ‘인간으로서’ 차별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통과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과, 이 법안은 비성경적 관점을 합법화하고 점차 교회를 억압하는 전초일 뿐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 같다.

법이란 것이 사회의 인식과 합의를 반영하기도 하고, 반대로 제정된 법이 교육적 효과로서 영향을 주기도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차별금지법의 통과가 당장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중장기적 관점에서 (성경적으로) 우려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리 간단치만은 않은 것이, 사회적으로 소외되어왔던 여성이나 장애인들의 인권 문제와 마찬가지로 성소수자들에 대한 현실적 차별문제 개선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법적 장치가 필요한 부분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성애 찬성 문제를 떠나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혹은 차별받지 않아야 할 권리에 대한 것이며 현재 차별금지법 발의는 이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외국 사례를 들어 차별금지법의 이후 발전(?) 수순은 교회에 대한 역차별로 이어질 것이 자명할 것이라는 교회의 염려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볼 수는 없으나 현재 차별금지법 수준의 장치를 반대할 논리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동성결혼 합법화와 같은 문제야말로 합의점을 찾기 쉽지 않은 것인데, 성경적으로는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답하는 것이 옳으나, 이 대답은 곧바로 LGBTQ+와 찬성론자들에게 차별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즉, ‘차별’의 범위에 대한 인식이 매우 다르다. LGBTQ+와 찬성론자들에게는 단순하게 채용, 교육, 승진, 임금 등의 차별을 받지 않는 것을 넘어 성 정체성과 성 지향성 자체를 인정받는 것 자체가 권리이며 이를 침해받는 것은 모두 차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법적 문제에 대해 교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개인적으로는 차별금지법 자체를 반대할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의 성경적 교육이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도록 하는 보완 법안 상정이라던가, 관련 교육 콘텐츠 개발 등이 더 온건하면서도 적극적인 대응이 아닌가 싶다. 지금과 같은 자극적 대응은 ‘교회의 죄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동성애 문제만 들고 일어나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내는 보수꼴통’으로 인식되는 역효과만 불러올 뿐,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은혜입은 죄인’으로서 진리를 따르고 전파하는 것이지, 세상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차별금지법도 통과되고 교회의 입장은 더 고립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들을 ‘사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필자의 관점에서는 적어도 ‘뱀처럼 지혜로운(마 10:16)’ 방안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필자가 차별금지법에 잠재된 향후 문제 가능성에 대해서는 염려하면서도, 교회의 차별금지법 반대운동에 긍정적이기 어려운 이유다.


‘차별금지법 반대’에 반대하며

1) 민감한 주제의 글을 시작하며
2) ‘행위’에 초점을 맞춘, 그 부실한 근거
3) 우리는 ‘은혜입은 죄인’이다
4) ‘죄성’에 대하여
5) 성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리고 교육의 문제
6) 동성애 문제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

‘차별금지법 반대’에 반대하며 (5/6)

성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리고 교육의 문제

그럼에도 남아있는 문제가 있다. 바로 이미 성 정체성과 지향성의 혼란을 겪고 있거나 이미 성 정체성과 성 지향성에 대한 결론을 내린 사람들이 스스로 진단해야 할 문제, 즉 ‘내가 이 문제의 당사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과 이들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먼저 성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스스로를 남성으로 혹은 여성으로, 혹은 심지어 무성(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경우)으로 여기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체성의 문제조차도 ‘성(性)’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 인간에게는 왜 성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성은 왜 하필 따로 존재할까? 오직 번식이나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한 몸에 있어도 되는 것 아닐까? 실제로 이런 류의 질문은 생물학적 또는 사회적으로도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결론을 내리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한가지로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설계(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비기독교인들이 볼 때 이 대답은 매우 무책임하고도 비과학적으로 들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해석하기 힘든 문제를 초자연적 영역으로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자연을 연구하면 할 수록 세상이 우연히 생성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 개입으로 정교하게 설계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의 과학적 접근은, 종교와 과학은 배척관계에 있다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이끌어낸다. 천문학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잘 알려진 케플러는 당대 종교적 세계관으로 주장된 천동설을 무책임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려는 자세로(널리 알려진 그의 언행에서 명백하게 밝히고 있듯이) 지동설을 과학적으로 검증함으로써 근대 과학의 토대를 놓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요컨대, ‘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는 전제가 단순히 맹신에 의한 주장이 아니라,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현실을 인정하는 겸손이며, 그렇기에 세상(여기서는 성의 문제)을 바라보는 틀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성 정체성’을 논의하는 맥락 자체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성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닌 누군가의(하나님) 설계 하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연히 생겨난 것이고 내가 마음대로 선택 가능한 자아의 문제라면 성 정체성을 찾을 이유조차 없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셨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며, 이는 내가 나를 어떻게 인식하던지간에 남성 또는 여성으로 태어나도록 설계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나의 성 정체성을 생물학적 성과 다르게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성 역할에 대한 선호(예: ‘나는 남자로 인정받고 싶어’) 또는 거부감(예: ‘내가 왜 남자로 여겨져야 하지?’)을 현실에 반영하려는 시도일 뿐, 그 인식이 실체적이이지는 않다는 뜻이다. 이런 면에서 성 정체성이 개인의 선호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 볼 때는 논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으며 현실적이지도 않다.

그러면 성 지향성은 어떨까? 이 또한 성경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룰 것’을 말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음을 밝히고 있고, 이성에게 끌리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성경에 기반하지 않은 성 지향성과 관련한 주장은 개인의 성 정체성과 무관하게 어떤 성에게 끌리는가의 문제는 개인적 선호일 뿐이라는 것이며, 이는 성 정체성에 관해 설명한 앞선 논리와 동일한 맥락에서 성경적으로는 타당하지 않다.

자신의 성 정체성과 지향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라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특히 자아가 형성되어 가는 청소년기에 동성과의 가까운 감정을 사랑(‘사랑’이 무엇인가의 논의는 이 자체로 방대한 주제이니 여기서 다루기 어렵지만, 청소년기의 감정이란 일반적으로 꽤나 열정적이니만큼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으로 인식하여 본인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던가 하는 등의 문제이다. 어떤 교육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 정체성을 성인이 된 이후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던가, 일부는 상황에 따라서 성 정체성을 바꿔도 된다고 교육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교육이 오히려 성 정체성 또는 지향성의 혼란을 겪지 않던 청소년들마저 고민하도록 만들고 있다(이런 교육의 목적 자체가 자신의 성을 주어진대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이런 결과는 당연한 듯 보인다).

특히 필자가 가르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이런 문제들이 꽤나 우려스럽다. 모든 청소년들을 만나본 것도 아니고 설문을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이런 현실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갈리는 것 같다. 이 사안을 깊이 사색해 보지 않은 그들로서는, 동성애자들을 무조건적으로 혐오하게 되거나 교회를 거부하게 되는 두 극단으로 빠지는 경우를 자주 발견하게 된다.


‘차별금지법 반대’에 반대하며

1) 민감한 주제의 글을 시작하며
2) ‘행위’에 초점을 맞춘, 그 부실한 근거
3) 우리는 ‘은혜입은 죄인’이다
4) ‘죄성’에 대하여
5) 성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리고 교육의 문제
6) 동성애 문제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

‘차별금지법 반대’에 반대하며 (4/6)

‘죄성’에 대하여

그러면 동성애 또는 나아가 LGBTQ+의 사고방식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죄성’에 맞닿아 있다고 볼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옳음’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주제를 살짝 돌려서 인권에 대해 생각해보자. 인권은 매우 중요하다. 왜일까? 우리 모두가 인간이기에 인권이 중요한가? 아니면 인권을 중시하기로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일까? 그 합의는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 걸까? 인권의 이해나 근거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있으나 보편적인 합의에 도달하기란 매우 어려운 주제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하나의 결정적 근거를 제시한다(기독교인들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긴 하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고 복 주시기로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일하고도 완전한 이유가 된다. 비록 역사적으로는 기독교인들이 비참한 인권 말살의 현장들에 참여한 경우들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것이 기독교가 인권을 무시하고 있다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오히려 인간의 죄성을 더 극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인권의 근거로 본다면,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할 사회적, 신앙적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 기준이 없다면, 인권 개선의 방향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합의가 인권인가? 아니면 인류 보편적으로 시대를 넘어 지향할 수 있는 방향성이 있는 것인가? 만일 미래에 동성애 문제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다르게 형성된다면, 문화적 관행 혹은 상대주의에 기반하여 새롭게 협의해야 하는 문제인가? 아니면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그대로 지켜져야 할 원칙이라면 그 원리는 누가 결정하고 협의한 것인가? 소아성애와 근친상간도 성적지향으로 인정받으려는 시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눈치챈 이들도 있겠지만, 이 문제는 단순히 나의 성 정체성과 지향성을 그대로 인정받는 것을 넘어서 종국에는 옳고 그름을 ‘내가’ 혹은 ‘사람에 의해’ 협의하고 결정하려는 시도이며, 그럼에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는 자연스럽게 이런 성경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 17:6)”

동성애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 기독교인과 비독교인들간에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두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틀림’이란 존재하기 매우 어려운 반면,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주되심을 부정하고 내가 주인된 본성에서 기인한 모든 행위가 죄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동성애가 죄인가’라고 묻기보다는 ‘동성애가 죄성에서 기인한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한다면 신앙적, 성경적 관점으로 볼 때 동성애를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몇몇 LGBTQ+ 신학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성경이 동성애를 옹호한다는 주장을 하고는 있으나, 여기에 언급조차 할 필요없을 정도로 신학적으로는 물론 논리적으로도 매우 빈약한 수준인 것만 보아도 죄성에서 기인한 표면적 행태를 합리화하려는 발버둥 정도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또 일각에서는 동성애 문제가 선천적이므로 죄일 수 없다거나, 환경에 의한 후천적인 문제이므로 죄 또는 치료의 대상이라는 둥의 주장 및 연구결과로 대립하기도 한다. 그런데 기독교 입장에서 이 논의가 정말 핵심인가? 죄성의 문제는 선천적이기도 하고 후천적이기도 하다. 성경적으로 보면 아담의 후손으로서 우리 모두는 ‘선천적으로’ 죄 아래에서 났으며(롬 3:9), 이로 인해 ‘후천적으로’ 나의 선택에 의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선천적이라 해서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후천적이라 해서 전환치료를 강요한들 그 성공률이 그리 높지도 않다(일부 동성애에서 돌아온 사례만을 가지고 동성애가 후천적이라는 증거로 삼는 경우가 있지만, 그만큼 매우 희귀한 경우로 보인다). 이런 류의 주장에 대해서는 되려 다른 질문을 하고 싶다. 온 세계에 만연한 음란의 문제는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

동성애 그 행위 자체를 죄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표면적인 접근이며, 문제의 본질도 아니다. 예수님은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하셨다(막 9:47). 이것은 행위 하나하나가 아닌 문제의 본질 관점에서의 엄격함을 요구하시는 것이며 여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당연히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행위가 허용되는 것은 아니나, 이런 우리의 모습은 성경적으로 볼 때 자책하거나 남들을 정죄거리로 삼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죄성과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함을 깨닫고, 역으로 그에 비례하는 은혜의 크기에 감사하는 결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감사함 속에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할 의무이자 권리를 가졌기에 점진적으로 죄된 행위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말 동성애 행위 자체가 문제인가? 우리의 죄성이 문제인가? 동성애는 우리의 죄성으로 인한 행태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왜 교회는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와 비리에 대해서는 조용하면서(특히 교회 내에서의 문제들은 더더욱) 유독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만 그리 민감한지 모르겠다. 그럴거라면 성폭행 반대 또는 처벌 시위라도 좀 하던가.

죄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죄성을 인정하고(회개) 하나님의 은혜(구원)를 구하는 것 외에는 없다. 그리고 예수님 외에는 그 방도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다.


‘차별금지법 반대’에 반대하며

1) 민감한 주제의 글을 시작하며
2) ‘행위’에 초점을 맞춘, 그 부실한 근거
3) 우리는 ‘은혜입은 죄인’이다
4) ‘죄성’에 대하여
5) 성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리고 교육의 문제
6) 동성애 문제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

‘차별금지법 반대’에 반대하며 (3/6)

우리는 ‘은혜입은 죄인’이다

기독교 신앙의 견지에서 볼 때,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주되심을 부정하는 것’에 있다.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의 동기에 죄성이 숨어있는 것이다. 물론 죄성이 행위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들이 많으나, 행위 자체에 집중하여 비난하기보다는 인간의 죄성과 그 죄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렇다면 동성애는 죄인가? 또한 앞서 제시한 레위기 구절에서 포괄하지 못한 다른 행태들은 죄로 규정할 수 있는가? 이 부분을 성경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하나님이 태초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들의 결합을 통해 번성하고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신 그 목적과 원리를 볼 때, 동성애가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방식은 아니었음은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성 정체성의 문제를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라는 기독교의 대원칙에 어긋난다. 하나님이 ‘실수로’ 남자로 태어날 아이를 여자로 만드셨거나 반대의 상황을 만드셨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 지향성 문제는 어떨까? 만일 조합의 지향성을 모두 계획 혹은 허용하셨다면 굳이 혼란을 야기해가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실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남성간 혹은 여성간 사랑을 통해서도 번성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면 해결되었을 일 아닌가? 아니, 애초에 ‘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제정하지 않으셨어도 될 일 아닌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한다면, LGBTQ+에 해당하는 각각의 행태가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섭리의 방식에 부합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개인의 정체성과 지향성에 대한 인식이 이에 선행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주되심에 대한 부정, 즉 ‘죄성’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죄성은 그들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인류 보편적인, 우리 모두의 문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구원하셨다.

다시 말해서, 행위에 초점을 맞춰 그들을 ‘죄인’으로 정죄하기보다는, 죄성과 그 열매(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는)로부터 우리의 죄성을 돌아보아야 한다. 역설적으로 다른 이들의 행위에 초점을 맞춰 재판관으로로 서있는 듯한 태도 자체가 더욱 우리의 죄성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회는 왜 교회의 부조리와 부패, 목회자들의 성적 부패에 대해서는 잠잠한가? 성추행했던 목사는 왜 버젓이 목회를 이어나가고 있는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들의 절대 다수는 자신이 동성애를 저지를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을 쉽게 정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신앙적 고찰 없이 단순히 거부감이 들기 때문에, 내 자식에게는 허용할 수 없기 때문에 강렬하게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닌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은 참정권을 가진 국민으로서 얼마든지 의견을 표출할 권리가 있는 것이나, 그 논리가 ‘죄성’에 대한 신앙적 고찰없이 ‘행위’에 초점을 맞춘 거부감에서 발로한 것이라면 그것 자체로 오히려 차별금지법의 정당성을 더 지지해주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은혜입은 죄인’이다. 여전히 죄성의 한계 아래 생활하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은혜가 모든 이에게 미치도록 기도하고 전하는 것이지, ‘정죄’할 거리를 찾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런 교육을 시킬 수 없다며 시위하며 세상과 ‘분리’하기 보다는 올바른 성경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거룩하게 구별’되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이나 주변 모든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리와 창기와 같은 당시 ‘죄인’으로 취급받던 자들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과 함께 교제하심으로, 그들이 ‘죄성’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결정적인 구원의 계기를 제공하셨다. 교회의 사랑없는(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극적 행태) 태도는 그들의 반발을 부추길 뿐더러 오히려 교회에서 더 멀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 반대’에 반대하며

1) 민감한 주제의 글을 시작하며
2) ‘행위’에 초점을 맞춘, 그 부실한 근거
3) 우리는 ‘은혜입은 죄인’이다
4) ‘죄성’에 대하여
5) 성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리고 교육의 문제
6) 동성애 문제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

‘차별금지법 반대’에 반대하며 (2/6)

‘행위’에 초점을 맞춘, 그 부실한 근거

기독교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근거는 당연하게도 성경에서 출발한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레 18:22-23)”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구절은 남성 간 성관계의 문제와 수간을 금지하는 구절이며, LGBTQ+로의 확장, 즉 성 정체성과 지향성에 대한 전반을 포괄하고 있는 구절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기독교의 성소수자에 대한 공격은 주로 남성 동성애자를 향하고 있다. 주로 이런 식이다.

“동성애자는 항문 성교 후유증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에이즈 환자의 80% 이상이 동성애자입니다. 그리고 그 치료비는 모두 국민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남성 동성애자의 경우 해부학적 특성상 이성 커플에 비해 항문성교 행위의 가능성과 그로 인한 위험에 상대적으로 더 노출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의학적으로도 알려진바와 같이 항문성교의 경우 에이즈의 전파력이 더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마치 모든 동성애자들이 항문성교를 하고 있으며 그 후유증 또는 에이즈와 같은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듯한 저주에 가까운 표현, 그리고 그 치료비를 왜 우리가 지출해야 하는가와 같은 피해의식을 자극하는 표현은 남성 동성애 혹은 그 옹호자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불쾌하면서도 논리적으로도 설득되기 힘들다.

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정확한 통계를 찾기는 어려우나 실제 후유증과 에이즈를 겪고 있는 사람들은 남성 동성애자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일 뿐이다. 이성애자들에 비해 가능성이 높을 뿐이지 모든 남성 동성애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문제가 아닐 뿐더러, 이런 문제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더 조심하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2. 성적 자극에 눈을 뜬 사람들은 위와 같은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청소년기에는 동성을 보며 마음이 설렌다던가 가슴이 뛰는 등의 심리적/감정적 호감으로 그치는 경우가 흔함에도, 주로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일부’ 동성애자들의 문제를 자신들에게 대입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을 가질 수 밖에 없다.
  3. 저런 식의 표현은 남성 동성애자들의 성적 행위에 대한 비난이 마치 이성애자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성애자들의 난잡하고 비위생적인 성행위(다자간 성행위, 스와핑 등)로 인한 문제 발생이 수적으로나 비율적으로 동성애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문제에 비해 더 우세함에도, 그것을 동성애자들을 비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정당하지 않은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서 언급한 성경구절은 ‘남성간 성행위’만을 규정하고 있으며 여성 간의 감정이나 성행위는 물론 성 정체성과 지향성의 나머지 조합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으므로, 동성애를 반대할 근거로 삼기에는 너무나 빈약하다 (단적으로, 여성 동성애자들은 항문성교 비율은 매우 낮으며 에이즈 발병률은 더더욱 희박하다).

성경적으로 볼 때 동성애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것이 마땅하나(동성애자에 대한 인격적 수용과 권리 문제는 별개), 일부 극단적 사례를 앞세우는 교회의 반대논리는 자극적이면서도 합리적이지 않다. 정치적인 목적으로서는 교회 내에서만 통용되는 논리가 적용되기 힘들기 때문에 사회적 공감을 얻기 위한 전략으로 선택한 방식일 수 있으나, 오히려 역효과가(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차별금지법 반대’에 반대하며

1) 민감한 주제의 글을 시작하며
2) ‘행위’에 초점을 맞춘, 그 부실한 근거
3) 우리는 ‘은혜입은 죄인’이다
4) ‘죄성’에 대하여
5) 성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리고 교육의 문제
6) 동성애 문제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