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한 몇가지 오해

불과 20여년전만 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 시비가 있을 정도로 화제가 될만한 표현이었다. 특히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가르친다는 예수전도단(YWAM)의 획기적인(?) 발상이 그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내가 예수전도단에 들어가게 되었던 계기가 생각난다. 교회에 예수전도단에서 활동하던 선배가 한 명 있었는데,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쯤 예수전도단에 들어가라는 권유를 받았고, 왜 예수전도단이냐라는 질문에 그 선배가 했던 대답은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가르쳐준다' 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단 한마디에 예수전도단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그만큼 '하나님이 진리인가', '정말 살아계시는가'에 대한 확인을 할 수 있지 않겠나라는 기대감, 단순히 그 이유 하나로 개강일도 아닌 입학식날 예수전도단 동아리방에 올라가 등록해버렸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에 대한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한 갈급함과 탐구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따라 사는 것에 대한 반발이 예전만하지는 않은 듯하다. 여전히 거부감이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갖고 있는 교단이나 단체들도 있지만, 이제 많은 교회들이 그 분의 음성을 따라 살고자 하는 갈망을 갖고 있고, 가르치고 있다. 또 동시에 이러한 방식이 교역자들뿐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언할 수 있다'로 확산되고 있다.

나 또한 이러한 움직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누구보다 크게 동의하며 이를 권면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삶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태도들이 있지 않은가 하여 이를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첫번째 오류.
 예배를 하면서 '기름부으심'을 얘기하는 교회가 많아졌다. 진정한 기름부으심에 대해 모르면서도 이 단어를 남용할 정도니 말이다. 어쨌든, 영적으로 민감한(또는 스스로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은 예배에 참석하면 그 예배의 기름부으심에 대해 '측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측정 결과'를 의심의 여지없이 그 예배를, 혹은 그 예배팀의 수준을 정하는 기준으로 사용한다. 또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심층분석을 시작한다. 예를들어 '저 찬양인도자는 축사가 필요해', '저 보컬은 기도생활을 게을리 했어'  등등 말이다 (예배에 대해서도 이 점과 관련해 포스트를 쓰고 싶은 주제가 있지만 이 글에서 언급하는 것은 무리고, 기회가 되면 써보겠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것은, 그 결과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위의 경우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사람을 영적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냥 '느껴지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음성 또한 대부분의 경우 느껴지는 것에 가깝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 중 내면에 들리는 음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것이다. 위의 예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면, 중보기도 때 음성을 듣고 나눈 후 기도하는 그룹에 속한 사람이라면 쉽게 수긍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그렇다면 누가 맞는 것인가? 소위 영적으로 더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은 사람이 느낀 것만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인가? 아니면 모두다 맞는 것인가?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른 것인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답변은 무엇인가?

번째 오류.
 하나님과의 교제와 친밀함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오류가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이나, 이 점을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 있다는 뜻이다. 이 점은 하나님의 음성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하는 데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마치 '나를 위로하고, 나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어떤 느낌' 정도로 여긴다(물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음성의 '무게'를 배제한다는 의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믿어서 손해볼 확률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라면(위의 경우처럼) 그러한 느낌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100%(혹은 이에 근접한) 확신하는데 주저함이 없고, 자신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마저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정작 삶에 영향을 주는 말씀이 주어지는 경우면 그야말로 '다각도로 분별'한다. 몇 초만에 주어지는 대화는 아무 분별없이 받아들이지만 그 대화의 무거움이 느껴지면 몇 일이 걸려 분별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정말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자연스러운가? 그들이 듣고 있던 그 음성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확신하는가?

 

우리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를 삶에 실천하며, 때로는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거쳐가며 경험한 사람들일 수록, 또 사역으로 섬기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빠지기 쉬운 오류는, 자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분별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관련된 책에서는 이것을 마치 아기가 부모의 음성을 듣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자신의 부모의 목소리를 분별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 또한 그러한 경험을 통해 더 잘 분별하게 된다는 논리로 설명한다.

일정 부분에서는 맞는 말이기는 하나, 그들이 놓치고 있는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음성을 분별하는 것은 여전히 신중하게 거쳐야할 중요한 단계라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점을 사람들이 머리로는 인정하되, 위에서 언급한 오류들처럼 실제 삶에서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의 삶의 태도에 요구되는 태도가 있다.

첫번째는, 하나님은 완벽하시되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있는 주체는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분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사역해야 하는 경우라면, 그 때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기름부으심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역을 행하는 사람의 불완전함은 여전히 남기 때문에 오히려 그 사역을 받는 자들의 분별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예언을 행하는 자던, 받는 자던 그 예언을 100% 확실시 하면 안되며 반드시 분별해서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하물며 그러한 특별한 기름부으심이 없는 때에 들은(혹은 느낀) 음성에 대해서이겠는가? 

bible 고전 14:34-36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위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이 사역하던 시대에 여자를 차별했다는 증거인가? 아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관계가 있다. 고린도 교회는 당시 어느 교회들보다 은사가 활성화된 교회였으며 너무나도 남용되어서 문제일 정도인 교회였다. 바울이 은사를 사모하되 사랑으로 행하라고 말하기 위해 사랑장(고전13장)을 따로 할애할 정도였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있던 여자 성도들이 너무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주장하면서 문제가 생기자 이를 자제시키기 위해 바울이 언급한 부분이 위 구절이다.

그 여자 성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없는, 혹은 분별할 수 없는 영적으로 '어린',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이기 때문인가?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bible 고전 14:27-30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같은 장인 고전14장을 보면, 이미 바울은 그들의 예언을 인정하고 있으되 '질서를 따라 행할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구절은 '예언사역을 할 때의 규범'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언 할 때 분별의 중요성과 사람의 오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예언에 익숙했던 초대교회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덕목이 요구되었다. 

현대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성숙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가 아닌, '제게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라고 나누라고 권면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주체는 '사람'이며 어느 누구도 오류의 가능성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신중하게 분별해야할 책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그 분의 음성은 듣는 것으로 끝나는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분의 음성은 구약시대에는 우뢰와 같은 소리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히 듣기조차 두려워했던 소리였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휘장을 찢으심으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주셨고, 심지어 우리 몸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으로 삼으시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 그 분의 말씀, 로고스와 레마로 주어지는 영적 깨달음, 어떠한 형태이던지 그 분이 제하시지 않은 것은 그 음성의 '진중함'이다. 

현대에 와서 아가서의 재조명과 계시가 풀어지면서 하나님과의 친밀함, 그 분의 자상함, 사랑이 강조되고 있지만 그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가 되고 있는 듯하다. 여전히 그 분의 말씀은 우리 영으로 감당할 수 없을만큼 크고 놀라운, 경외감을 준다는 점이다. 또한 그 분과의 대화가 단순히 우리의 기분을 만족시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순결한 그 분의 말씀은 연약하고 죄많은 우리에게는 항상 부딪힐 수 밖에 없는 걸림이 되거나, 결단이 필요한 순종의 요구가 된다는 점이다. 

bible 약 2:18-23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야고보가 호소하는 구절이다. 흔히 해석하듯이 이 부분은 '믿음'만이 아니라 우리의 '행함'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구절로 사용되고 있지만, 나는 여기서 '믿음'의 부분을 앞에서 말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으로 범위를 좁혀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하나님을 믿고 있고, 친밀함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영적 상태가 괜찮다고 여기는 그 '믿음'은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우리는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이 점을 간과하면 친밀함으로 가장한 그 느낌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음성만 쏙 빼서 듣고 그 분의 우리를 향한 깊은 마음은 놓칠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렇게 가볍지 않다.

그 분의 말씀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칠 정도의 순종을 요구하는 음성이었다. 당시 자식을 제단에 바치는 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저주를 약속(?)받는 이방신을 섬기는 제사 방법이었는데, 아브라함은 자신이 들은 음성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순종했을까? 기적과 같이 낳은 아들 이삭을 드리라는 그 음성이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사단의 역사로 분별하고자 하지는 않았을까?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이삭을 데리고 가는 장면에서 그의 순종을 본받으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가 그 전날 밤새 고민하느라 잠을 못자고 아침이 되어서야 분별의 끝을 결정한 것이라 생각한다.

산을 오르면서도 그는 진정 하나님의 음성인지 여전히 혼란스러웠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는 그것을 순종했으며, 이삭에게 그것을 나누었고 그의 동의를 구했다(뭐 일방적인 통보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그리고 다들 알고 있는 스토리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셨고, 비로소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벗'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느낌 속에 이루어지는 대화라고 여겨지는 그것으로 결정되는, 마치 Twitter에서 Follow하는 것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Follow하는 순가 상대방의 글이 보여지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과 친구가된 것처럼 착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맞팔'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분의 말씀의 진중함을 잃어버린 채 우리의 순종이 결여된 삶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벗'이 되는 길은 그 음성을 잘 듣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아내는 순종이 그 열쇠이다.

 

하나님의 음성, 예언 그리고…. 영적 권위.

글이 너무 길어지고 있지만 이 것을 언급하는 것이 꼭 필요한 듯 하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음성은 그 분의 마음을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곧 예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언의 기능이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고전 14:3)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나누는 행위는 '지식의 은사'로 포장된 그 사람의 정보를 알아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마음을 따라, 그 분이 주신 권위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세우는 일종의 선포이다. 다시 말해 예언은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을 미리 말하거나 그 사람의 과거를 들추어내는 것이 아닌, 연약한 사람의 선포를 통해서(심지어 그 예언이 틀릴지라도) 일하시길 원하시는 그 분의 사랑이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또 예언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볼 것은 영적 권위에 대한 부분이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주어지고 있지만 하나님이 동시에 영적 권위를 허락하셨다. 생각컨데, 우리의 연약함(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것에 있어서)을 아시고 만드신 장치가 아닌가 한다. 각자가 느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도 너무나 큰 가치가 있지만, 우리에게 영적 권위자를 주심으로써 때로는 나에게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하신다.

 

이 점을 종합해보면, 

영적 권위자는 자실을 통해 전달되는 말은 하나님이 말씀하길 원하시는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들었을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고 그 감동을 겸손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그 영적 권위 밑에 있는 자들은 영적 권위자를 통해 주어지는 말씀을 통해 일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겸손히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질서'이다. 이 질서를 많은 교역자들은 자신의 말에 권위를 스스로 세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문제이고, 일반 성도들은 이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이 문제다.

사람들은 흔히 권위자가 맘에 들지 않을 때 그 권위자의 말이 자신이 들은 음성과 다르다고 느끼며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귄위자의 말이 걸림이 될지라도 여전히 자신이 느끼는 그 음성의 분별이 정확하지 않을 것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하며(심지어 올바르게 분별했을지라도), 연약한 사람인 권위자의 선포(예언)를 통해 일하길 원하시는 그 분의 마음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영적 권위자라도 그 권위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들의 입에서 대언되는 그 말씀의 무거움을 충분히 인식해야만 한다. 그들의 입을 통과해 나오는 그 말이 즉 하나님의 음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선포를 사용하여 일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위자이던 아니던 간에, 또 어떤 형태로 주어지던 간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느낌을 100%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음성이 주어진 이유는, 그 초점은 '그 음성을 잘 분별했는가'보다도 '그 분의 음성에 겸손하게 반응하고 순종하는가'에 있다. 누구나 분별하는 일에 실수할 수 있으나 그 실수의 여부와 상관없이  분의 음성을 따라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 분의 음성을 듣는 삶은 신중하게 분별해야 하는 동시에 마음으로만 갖고 있는 느낌이나 믿음이 아닌, 연약한 인간의 선포를 따라 일하실 수 있도록 그 분께 기회를 내어드리는 것을 필요로 하는, 그 분의 사랑과 기다리심에 겸손으로 반응하는, 결단과 순종이 따라야 하는 ‘그 분과의 동행’이다.

에필로그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참 조심스럽다. 나름 10년 이상을 하나님의 음성을 좇아 사는 삶을 배우고, 알고자 노력하고, 고민하고, 경험해왔지만 내가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없고, 나 또한 연약한 한 사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 깨닫게 하신 것들에 감사하지만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아는 것들을 감히 내가 잡은 줄로 여김이 아니라, 아직도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과정에 있으며(빌 3:13), 겸손하되 내 안에 있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정을 기록하고자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