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가?

제목이 좀 과격한지 모르겠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그를 따르는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기도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던져보고 싶은 화두는, '기도의 능력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앞서 언급한 '크리스천'들의 기도에 대한 인식과 삶의 태도에 대한 문제를 짚어보려 한다.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기 전에, '기획(planning)'과 '개발(development)'의 관계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왠 뚱딴지 같은 말인가 하겠지만, 차차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기획'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 그 대상의 변화를 가져올 목적을 확인하고, 그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행동을 설계하는 것

을 말한다. 또, 개발은 백과사전에 아래와 같이 정의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보다 쓸모있거나 향상된 상태로 변화시키는 행위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기획이 무엇인가를 '의도'하는 것이라면, 개발은 그 의도를 실현해내는 구체적 '행위'를 의미한다고 간추려볼 수 있겠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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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는 기획과 결과 외에, 아이디어를 포함했다. 필자의 글 중 전략적 직관과 연결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는데, 여기서는 기획에 포함될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연결할 설명을 위해 분리했다. 핵심은, 적절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기획하고, 개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위 그림을 크리스천의 기도에 대한 도식과 매칭시켜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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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그림과의 차이점이라면, 시작과 끝이 '사람에 의한 것인가'와 '하나님에 의한 것인가'의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두번째 그림에서는 궁극적인 의도와 결과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요 17:4)' 것에 초점이 있다. 

그런데 아이디어는 계시와 매칭할 수 있고, 결과 또한 목적은 다를지언정 의도한 바를 이룬 것이라는 점에서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 기획과 중보기도는 정확히 매칭시킬 수 없는 부분이다. 왜 그럴까. 이 또한 근본적으로 '기획'이 사람에 의한 노력이라면,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기획하신 바를 나의 계획으로 수용하는 나를 내려놓는 과정이 수반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틈에 서서 때로는 마음을 찢으며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기획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있고, 이를 위해 중보기도하면 부흥이 임한다는 논리이다(진정한 부흥이 무엇인가에 대한 부분은 논외로 하자).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이 공식을 많이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결과를 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

 

크리스천들의 오해

이미 눈치챘으리라 생각한다. 두번째 그림에는 첫번째 그림의 '개발'에 해당하는 부분이 빠져있고, 대신 '순종'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기독교적으로는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고,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 '순종'의 영역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 있다.

첫번째 오해 – 우선순위?

순종이란,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중보기도인가? 혹은 24시간 예배하는 것인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인가? 영적 크리스천들이나 지도자들이 부흥을 외치고 세상의 변화를 목이 쉬어가며 선포하지만, 정작 세상의 변화를 위해 뛰어들어야할 사람들을 '평신도 사역자'라는 이름 하에 교회 건물 안에만 잡아놓고 있다. 한정된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기도하고, '기름부음' 받고 교회에서 봉사하면 하나님이 '복' 주시고, 세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성경을 세상의 논리와 짜깁기한 이상한 논리를 주장하고 있다(기도와 기름부음, 봉사 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필자 또한 누구보다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더욱 의아한 것은, 크리스천이면서 고위직에 있거나 큰 일들을 이룬 사람들은 우러러 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붙여가며 그 일을 이루기 위해 그들이 들인 노력은 감추어 버리고, 그들처럼 되기 위해서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하기에 여념이 없다.

두번째 오해 – 자기합리화, 자기위안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배와 기도, 찬양을 '은혜받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으며, 기름부음을 사모하는 것으로 가장한 '신(new) 기복주의'가 판치고 있다. 하나님의 계획을 나의 계획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반대로 뒤집어서, 나의 계획을 하나님께 주장하고 있고, 심지어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처럼 합리화하고 이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기름부음'을 받는 영적 어린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더 위험한 것은, 자신의 환경이나 계획들이 개선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만으로 여기거나, 기도 중에서 자기위안에 빠져있는 태도이다. 예배하면서는 뭔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지만 정작 삶에서는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좌절하고, 주일에는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위안을 누리는 반복에 머물러 있는 크리스천이 상당히 많다.

다음의 설명을 진행하기 전에, 위 두 그림을 합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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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통해 기획되고, 개발된 제품이 결과였다면, 이 그림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한 아이디어가 기획되고 개발하여 7 mind molders를 회복하는 결과물을 얻는 것에 있다. 즉, 목적은 두번째 그림과 같되, 성취의 방법론을 세부화했다.

먼저, 중보기도는 계시와 기획, 개발의 전 범위에 걸쳐져 있다. 중보기도는 특정 과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과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영역에 동시에 걸쳐진 행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기획'과 '개발' 모두 두번째 그림의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영역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영역이라는 점이다.

중보기도의 위치는, 직접적으로 결과물을 얻어내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각각의 단계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신 방향성을 잃지 않도록 하고, 그 분의 은혜가 임하시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시 질문해보자. '기도는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가?'

질문 자체가 틀렸다. 기도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기도는 그 분과의 교제에 초점이 있다. 그 분의 마음을 따라 부르짖기도 하고, 동일시 회개를 하기도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반면, 기획과 개발은 세상의 변화에 목적을 두고 있다. 즉,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영적 기획'에 가깝다면, 위 그림의 '기획'과 '개발'은 하나님의 기획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순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해본다면,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을 위해 기획된 그 분의 전략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종은 '기도 자체'가 아닌 일반적 용어로서의 '개발'을 의미하며, 이 개발을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전문성'이 요구된다. 다윗도 '예배만'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려야 했고, 때로는 전쟁을 해야했으며, 24시간 예배를 위해서도 사람들을 관리하고, 악기를 만들고, 연주하는 전문성을 필요로 했다.

기도만 한다고 세상이 변화되지는 않는다(대체 무엇을 위한 기도인가?). 그 분의 마음을 따라가는 순종이 세상을 변화시킨다(인본주의적인 목적이 아닌 이상, 빛이 임하면 바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순종은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세상의 변화는 그 분의 계시를 머리에 그리면서 '선포'만 한다고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유념할 것은, 우리가 순종한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에만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이 어떠했던지 간에, 그것은 그 분의 뜻을 따라 그 분의 때에 성취될 영역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는 점이다. 나를 통해 일하실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준비시키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전문성의 확보를 사명감을 갖고 기도하면서 이루어나가야 한다. '교회'라는 보호된 테두리 안에만 있으면서 이 부분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 평신도 사역자는 '교회 풀타임 사역자 같은 평신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평신도 같은 사역자'이다. 우리의 목적은 그 분과의 친밀함과 교제이되, 그 분의 마음을 따라 순종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하고, 교회는 성도들을 교회 건물 안에 잡아둘 것이 아니라 이 같은 마인드를 가르치고 교육해서 세상으로 파송할 수 있어야 한다.

에필로그
 글을 쓰면서도 중간 중간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글의 방향을 유지시키느라 힘이 들었다. 다시 읽어보며 검수해야 하겠지만, 다시 그런 욕구가 올라올 것 같아 못하고 있어서 다소 정리되지 않은 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긴 글 중 한 문장이라도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