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원치 않는 영적 예민함은?

영적 민감함과 예민함은 다른 것 같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 영적으로 예민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영적 동기에 있어 미묘하지만 매우 큰 차이가 존재한다. 

여기서 영적 예민함은 약간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그것은, 하나님께 초점이 있는 듯 보이지만 그것을 이용해서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심지어 이 사실을 본인이 모른다 해도)과 접해 있다. 

이러한 차이는 사역에 인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는 시간에 동참하는 마음인지, 혹은 누가(사람 또는 악한 영) '이것'을 방해하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지의 차이로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님을 핑계로 자신이 원하는 사역 결과를 그리고 있는 욕망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 시기와 방법을 자신의 생각으로 제한하는 교묘하게 숨겨진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사역자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며 경외할 수 있도록 질서를 잡기 위해 권위가 부여되었을 뿐, '예배'라는 본질적 속성을 조종할 수 있는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사역 대상에게 강요하는 것이, 회사에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팀원들에게 업무지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역자들의 모습이 참 슬프다. 교회에서의 리더쉽은 그런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과 판단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심지어 정죄까지 하는 모습.. 이것이 세상과 무엇이 다르고, 어떤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낼 수 있다는 말인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사명을 성취할 수 있도록 협력하며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도록, 또 그 분의 말씀을 향해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역자의 역할 아닐까. 

내가 슬퍼하는 그런 모습들이 영적 예민함을 갖춘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슬프다. 자신의 신학과 생각이 실타래처럼 엮어져 '옳다'가 되고 '진리'가 되어 그것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옳지 않은' 사람이 되고, 그것이 영적으로 하나님과 가까워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 본의 아닌 강요가 됨으로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아닌 정죄감을 심어주고 있다. 더욱 슬픈 것은 그러한 평강마저 강요됨으로 인해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정죄감을 갖게 되는 아주 이상한 모순이 사람들을 교회에서 떠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적 예민함이 아닌, 영적 민감함을 갖자. 나의 욕망과 사람이 아닌, 하나님 그 분을 바라보자.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단순한 한마디를 실천하는 것도 쉽지 않은가 보다. 사람의 마음은 악하고 연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