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하지 않고 대담하게, 그리고 눈치없이

생각해보면, 난 늘 누군가를 헤아려주고 이해해주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스스로를 여겨왔다는 편이 정직한 표현이겠다). 그런 탓에 감정을 표출하고 공감과 이해를 요청한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스스로의 본분을 망각하는 일일 뿐 아니라 내 스스로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내가 신이 아닌 이상에야 그것들이 필요한 때가 많았을텐데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기는 커녕 나의 상황을 알고 도우려는 손길마저도 거절했던 것 같고, 심지어는 거부감마저 들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나의 속마음을 터놓고 아무런 부담없이 감정을 표출할 수 있었던 대화 상대란 내게 존재할 수 없었다. 공감과 이해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한 사람이 곁에 있었다 해도 이건 내 마음의 벽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의 좁은 선입견 속엔 내 마음을 완벽하게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감정을 표출하면서도 동시에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야만 했고 결국 마음을 털어놓는 일 자체가 내게 피로로 다가와 더더욱 마음을 닫게 만들었다.

나에게 있어 나의 모든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하나님이었던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어린 애 마냥 울어 제껴도 상관없었고, 되지도 않는 말이나 늘어놓다가 침흘리며 잠들어버려도 아무런 부담없이 멋쩍은 웃음 한 번 지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힘든 상황에 대해 내게 피부에 와 닿는 해결책을 보여주지 않으신다 해도 원망의 대상이 되기는 커녕, 주저리 주저리 내 마음을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게 큰 위로가 되셨다.

건방지게도 나는 이런 마음을 하나님만 의지하는 순수한 믿음인냥 여기고 있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관계 지향적인 존재로 지으신 이상 나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음에도 나 스스로를 고립시키고는 그것으로 내 자존심을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고독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위로를 갈망하고 있었던 내 본연의 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었으리라.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여전히 미성숙하고 어리숙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다. 내가 기다렸던 것은 진정어린 공감과 이해, 그리고 그것을 함께 해 줄 사람이었음에도, 이제서야 감정을 표출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할 필요를 깨달은 탓에 마치 갓난아기가 의사표현의 방법을 몰라 그저 울어대는 것 마냥 빼액대고 있는 것 아닐까. 그나마도 지금까지의 관성 탓에 소심하게 드러내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나는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회사 문 앞에 투사되어 있는 문구처럼 ‘소심하지 않고 대담하게, 그리고 눈치없이’ 나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반대로 나에 대한 그러한 감정 표현도 잘 소화해 낼 수 있는 마음의 준비인 것 같다. 잘 해보자, 선호야.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