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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 같은 기도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 창세기 12:3

누구나 복을 좋아해서인지 교회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봤을 때 이 말씀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발견을 못한 것인지도), 불행하게도 나는 과거에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은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나를 저주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저주하시겠다는 무시무시한 말씀이, 은연 중에 과연 사랑의 하나님에게 걸맞는 약속인지에 대한 의문을 낳게 했던 것 같다. 그것이 나만의 의문이 아니었던지, 이 구절을 사용한 어떤 축복송에서는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는 쏙 빼놓기도 했다 (오래된 찬양이어서인지 악보도 음악도 찾기가 힘들다).

하나님은 왜 굳이 저주에 대한 말씀을 포함시키셨을까. 이 구절을 특별히 묵상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마음의 고통이 있는 시간을 지나는 동안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이 말씀이야말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구절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를 대신해 분노하시고 싸워주시는 하나님. 그렇지 않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분노하는 마음이 생기듯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만큼 더 크게 분노하신다는 사실이 내게 위로가 되고, 나의 고통에 비례해서 그 마음에 더 감동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이는 내가 오랫동안 제임스파울러의신앙발달단계에서소위우주적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기적이고 편협한 신앙으로 치부해왔던 다윗의 기도(나 자신은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면서도)를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나 자신의 고통과 비참함을 더 잘 인지하고 직면할수록 나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더 갈망하게 한다. 이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인간의 비참함으로부터 시작하는 것과도 맥이 닿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실상 이 구절의 비밀은 뒷부분에 있다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 표현은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마음이 내 원수를 ‘저주’하려고 눈을 부릅뜨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족속을 축복하기 원하신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족속들이 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발견하고 나를 축복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시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동시에 내가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함을 명령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이 구절은 사랑과 저주라는 모순의 실타래 속에서도 나와 인류를 향한 분명한 사랑을 드러내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강력한 영광과 통치를 강조하며, 내게 주어진 사명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매우 강렬한 말씀이다.

작년말에서야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어린아이와 같은 그리고 다윗과 같은 기도의 근거이기도 하다. 하나님 앞에서마저 고상한척 하고 있던 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나는 내 삶과 감정을 얼마나 하나님께 아뢰었는가. 그렇지 못했던 나의 태도야말로 불신을 반증하는 태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도한다. ‘하나님, 저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시고 저를 힘들게 하고 저주하는 자들을 벌해 주시되, 그것으로 인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드러나게 해주세요.’

진정한 행복이란 – 두번째 이야기

2017년 말미에 행복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고 나름 생각을 정리해가던 중 발견한 것은, 나는 지금까지 행복을 ‘녀석’이라고 지칭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행복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엇’이고, 이것은 나로 하여금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을 ‘소유’할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라 여겨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상 행복이란 것 자체가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 행복을 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대체물 내지는 상징을 소유함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암묵적인 추론을 하게 만들고, 내가 얻고 싶은 어떤 것을 그 대상으로 상정하여 적극적인 행복의 추구라는 허울 좋은 명목을 내세운 비정상적 집착이라는 부작용을 낳고야 말았다. 결국 그것을 얻으면 행복한 것이고, 얻지 못하거나 잃어버리면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주 전(2017년 12월 12일) 이후로는, 평소에 거부감을 갖는 기복적인 기도라는 생각에 피해 왔던, 나의 지극히 인간적이고 어린애 같은 초보적 기도라 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를 바탕을 두게 될 때 얼마나 큰 평안과 행복을 안겨주는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전의 기도야말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해달라’는 식의 고상한 척은 다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부끄러운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오히려 얻고 싶은 그 무언가의 소유 여부로 행복이 결정된다는 매우 기복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공식을 산정하고 있었음에도 깨닫지 못했던 셈이다. 대체 내가 무엇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어른인척 했단 말인가. 나를 위해 예비해두시고 구하면 주실 복들을 ‘저는 그런 것 필요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이면 족합니다’라고 아부해놓고는 뒤로 돌아서서 혼자 힘으로 바등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다.

주절주절 늘어놓았지만, 결국 행복은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에서 오는 문제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면서, 이제는 나의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기도와 함께 기복적 관점이 아닌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2017년의 가장 큰 수확이 아닌가 싶다. 내 바람을 솔직하게 기도하되, 그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방식을 신뢰하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 것. 이것이야 말로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의 근원이요, 진정한 행복이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2:9)

번외로, 이것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과 닮아 있다는 결론도 덤으로 함께 얻게 되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집착으로 그 대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태도로부터 시작되고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결론이다. 사랑을 소유물로 여길 수록 그 대상인에 대한 집착과 비일관적인 감정의 동요(시작과 끝을 갖는)를 사랑이라 착각하게 만들지만, 하나님을 바라볼수록 그 사람을 지속적으로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캄보디아에서 교육선교를 하고 계신 목사님이, 무려 17년전에 말씀해주셨던 그 의미를 왜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인지 아쉽기 그지없다. 물론 이러한 이해와 실천은 또다른 장벽이 있을테지만, 2017년의 마지막에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실천할 수 있는 마음의 기반을 다지고 2018년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감사하고도 가슴 벅찬 일이다.

 

2018년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

<우루과이 한 성당 벽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이라고 하지 마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면며 살아가면서.

“아버지”하지 마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지 마라,
자기 이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지 마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마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고” 하지 마라,
누군가에게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마라,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지렁이의 기도, 김요한 저, 새물결플러스」 중에서

2017년은 여러가지로 반성할 것이 많은 한 해다.
2017년의 기록

하지만 동시에 감사한 것은, 포장만 번지르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내게 울리고 있던 경고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루과이 성당의 벽에 새겨진 경고처럼. 한 줄 한 줄이 다 내게 해당되는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샌가부터 내가 모든 일을 다 저질러 놓고는 하나님께는 통보만 하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는 믿음이라는 허울좋은 탈을 쓰고는 기도와 말씀은 방구석 어딘가에 처박아둔 채 하나님께 막연한 뒷수습만 기대하고 있는 건방진 태도를 발견하게 됐다. 그 결과로 처절한 실패와 초라함만 남았고, 이것 또한 나를 다시 하나님께로 끌어내시려는 계획이심을 알게 된다.

오늘 사내 크리스천 모임에서, 내가 평소에 늘 기억하고 있던 성경구절을 나누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왜 스스로 그 길을 가려고 했을까. 내 자아는 왜 살아 꿈틀대고 있었까.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 분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 기도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시는 것을 나는 왜 먼 길을 돌아 실패해야만 깨닫게 되는가. 1-2년 전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려가고 있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계시지 않는 것 같아 ‘아직은 괜찮나 보다’했던 나태함과 교만함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나도 결국 보잘 것 없는 피조물일 뿐, 그 분의 크심 앞에 엎드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 여러가지 문제들과 마음의 짐이 산적해 있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2017년의 실패를 상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셨고, 입술을 열어 그 분께 맡겨드릴 수 있는 마치 물 속에서 주어진 호흡관처럼 소중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행복이란 ‘관계’ 속에서 나온다는 것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고, 이로써 그 중 가장 소중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나의 연약함과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무지함, 내 힘만 내세우려던 교만함이 하나님 앞에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이 모든 것들을 고쳐 세워 주시고 회복시켜 오히려 선으로 바꿔주시기를, ‘나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이 2018년을 맞는 나의 기도요 마음의 자세다. 뒤늦게나마 이것을 경험하게 된 나는, 이미 행복한 사람이고 점점 더 행복해질 예정이다.

2017년의 기록

늘 이맘 때, 날씨가 추워지고 주변이 슬슬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채워지는 것을 볼 때 쯤이면 마음 한 켠이 씁쓸하면서도 살짝 설레는 설명하기 힘든 오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올 해는 11월 중순이 유독 추운 탓인지, 반성할 것이 많은 탓인지 이 감정이 유난히 빨리 찾아온 것 같다.

무엇보다도 개인적 생활패턴과 감정 관리에 있어서는 수많은 부정적 내/외부적 요인들로 인해 스스로 너무나 불만스러운 한 해였다. 다행인 것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 스스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귀중한 발견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단지 비전과 일을 추구하는 것으로는 절대 충족될 수 없다는,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올 해는 인생의 목표를 단계적으로 밟아가는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한 해였고 비교적 짧은 기간에 불과한 시간 동안 추상적이나마 다음 단계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나름 만족스러운 성과를 일구어 냈음에도, 개인적 행복의 발견과 추구에 있어서는 처절하리만큼 무너져내린 삶이 그 증거이자 교훈으로 남았다.

망가져버린 기도의 삶,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늘 알면서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인생에서 통째로 잘라내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럽지만 실체조차 없는, 아직까지도 자다가 깨어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기억들과 후회감에 허우적대며 그 분의 도우심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팔을 내저으면 내저을수록 상황에서 벗어나기는 커녕 더 빠져들었고, 상처와 원망만 남아 나를 더 세차게 괴롭혔다. 결국 내가 주도권을 쥐겠다고 발버둥치며 정작 그 큰 부담감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게으름 탓이고, 늘 들고 다니며 하루에도 두세번씩 기록하느라 수북히 쌓인 기도노트들 위에 이제는 먼지가 쌓여 수개월에 한 번씩도 열어볼까 말까한 나의 교만한 죄책감과 두려움 탓이다.

뒤늦게나마 차가운 바람 덕분에 더 깊은 나락으로 끌고 가려는 삶과 사고의 관성 그리고 그 위험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 감사하다. 2018년 말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 때는 동일한 반성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 그리고 그 놈의 행복이란게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어디있는 녀석인지 찾아내야겠다.

행복, 이성, 사랑

“우리 그 때 행복했는데… 그치?”

나는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이긴 했던걸까. 이제서야 깨닫게 된 것이지만, 되돌아보면 난 그 때도 행복이나 사랑이 뭔지 몰랐던 것 같고 여전히 모르고 있는게 확실하다.

이제서야 드는 생각은, 행복이란건 무엇인지 정의되어야만 하는 개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의하려 하기 때문에 그 기준과 요건을 만족시켜야 하고, 그 기준이란 것 조차도 추상적인 탓에 또다른 정의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 아닐런지. 설령 그 기준을 만족시킨 무엇이 나타났다 한 들 이리저리 재보느라 행복을 행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나치고 경솔하게 내팽겨쳐 왔는지도 모르겠다.

더 안타까운 것은 행복하고는 싶지만 행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그에 당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낮은 탓인지 행복 추구에 대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심리에 갖혀 해결책도 모른채 정체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성(異性)을 만난다는 것도 비용과 리스크가 큰 모험일 뿐더러 상대방을 내 행복 추구를 위한 노력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싶지 않다보니 더 조심스럽다. 이런 내 생각을 이해해주면서도 내 존재 자체를 행복으로 여겨줄 수 있는 사람, 생각만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럼 사람…(이 내게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지만)

나는 하고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쉽지 갖추기 쉽지 않은 행복의 요인을 누리고 있음에도 내 안으로부터는 행복의 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성이라는 존재가 조금이나마 이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긴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관계지향적으로 만드셨다는 것이 이런 의미일까.

에로스와 아가페가 내 자신을 위해 어떠한 대가를 바라고 시작된 사랑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대상을 중심에 두는 사랑의 차이가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면, 궁극적인 아가페라는 것이 물론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겠지만서도, 난 그 의미에 한발짝도 다가서 있지 못한 것 같다.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경험들에 비춰 다분히 예상해볼 수 있는 어려움과 갈등들이 내게 너무 크게 보여서인지, 이런 심리적 장벽을 넘기 전에는 사랑이라는 것을 시작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 장벽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행복이란 화두

오늘도 어김없이 카페에 가는 길에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가족을 보면서, 추석이라고 나와있긴 하지만 오늘따라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힘든 것 아닐까 하는 삭막한 생각에 잠겨있다가, ‘저들은 지금 행복할까’하는 질문에 나도 모를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뭘 위해 이렇게 달려가고 있는걸까?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걸까?
종착점이 어디일지 모를 막연한 어딘가를 향해 분명 달려가고는 있지만, 그것이 내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건 아닐텐데. 어쩌면 행복은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것 아닐까.

행복이란건 기다림의 대상이 아니라 주변에서 찾아내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복으로 가장한 마약에 취하고 싶지는 않다. 행복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사실 행복이란, 별 것 아닌지도 모른다

소심하지 않고 대담하게, 그리고 눈치없이

생각해보면, 난 늘 누군가를 헤아려주고 이해해주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스스로를 여겨왔다는 편이 정직한 표현이겠다). 그런 탓에 감정을 표출하고 공감과 이해를 요청한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스스로의 본분을 망각하는 일일 뿐 아니라 내 스스로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내가 신이 아닌 이상에야 그것들이 필요한 때가 많았을텐데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기는 커녕 나의 상황을 알고 도우려는 손길마저도 거절했던 것 같고, 심지어는 거부감마저 들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나의 속마음을 터놓고 아무런 부담없이 감정을 표출할 수 있었던 대화 상대란 내게 존재할 수 없었다. 공감과 이해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한 사람이 곁에 있었다 해도 이건 내 마음의 벽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의 좁은 선입견 속엔 내 마음을 완벽하게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감정을 표출하면서도 동시에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야만 했고 결국 마음을 털어놓는 일 자체가 내게 피로로 다가와 더더욱 마음을 닫게 만들었다.

나에게 있어 나의 모든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하나님이었던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어린 애 마냥 울어 제껴도 상관없었고, 되지도 않는 말이나 늘어놓다가 침흘리며 잠들어버려도 아무런 부담없이 멋쩍은 웃음 한 번 지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힘든 상황에 대해 내게 피부에 와 닿는 해결책을 보여주지 않으신다 해도 원망의 대상이 되기는 커녕, 주저리 주저리 내 마음을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게 큰 위로가 되셨다.

건방지게도 나는 이런 마음을 하나님만 의지하는 순수한 믿음인냥 여기고 있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관계 지향적인 존재로 지으신 이상 나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음에도 나 스스로를 고립시키고는 그것으로 내 자존심을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고독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위로를 갈망하고 있었던 내 본연의 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었으리라.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여전히 미성숙하고 어리숙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다. 내가 기다렸던 것은 진정어린 공감과 이해, 그리고 그것을 함께 해 줄 사람이었음에도, 이제서야 감정을 표출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할 필요를 깨달은 탓에 마치 갓난아기가 의사표현의 방법을 몰라 그저 울어대는 것 마냥 빼액대고 있는 것 아닐까. 그나마도 지금까지의 관성 탓에 소심하게 드러내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나는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회사 문 앞에 투사되어 있는 문구처럼 ‘소심하지 않고 대담하게, 그리고 눈치없이’ 나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반대로 나에 대한 그러한 감정 표현도 잘 소화해 낼 수 있는 마음의 준비인 것 같다. 잘 해보자, 선호야.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