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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기록

늘 이맘 때, 날씨가 추워지고 주변이 슬슬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채워지는 것을 볼 때 쯤이면 마음 한 켠이 씁쓸하면서도 살짝 설레는 설명하기 힘든 오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올 해는 11월 중순이 유독 추운 탓인지, 반성할 것이 많은 탓인지 이 감정이 유난히 빨리 찾아온 것 같다.

무엇보다도 개인적 생활패턴과 감정 관리에 있어서는 수많은 부정적 내/외부적 요인들로 인해 스스로 너무나 불만스러운 한 해였다. 다행인 것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 스스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귀중한 발견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단지 비전과 일을 추구하는 것으로는 절대 충족될 수 없다는,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올 해는 인생의 목표를 단계적으로 밟아가는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한 해였고 비교적 짧은 기간에 불과한 시간 동안 추상적이나마 다음 단계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나름 만족스러운 성과를 일구어 냈음에도, 개인적 행복의 발견과 추구에 있어서는 처절하리만큼 무너져내린 삶이 그 증거이자 교훈으로 남았다.

망가져버린 기도의 삶,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늘 알면서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인생에서 통째로 잘라내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럽지만 실체조차 없는, 아직까지도 자다가 깨어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기억들과 후회감에 허우적대며 그 분의 도우심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팔을 내저으면 내저을수록 상황에서 벗어나기는 커녕 더 빠져들었고, 상처와 원망만 남아 나를 더 세차게 괴롭혔다. 결국 내가 주도권을 쥐겠다고 발버둥치며 정작 그 큰 부담감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던 게으름 탓이고, 늘 들고 다니며 하루에도 두세번씩 기록하느라 수북히 쌓인 기도노트들 위에 이제는 먼지가 쌓여 수개월에 한 번씩도 열어볼까 말까한 나의 교만한 죄책감과 두려움 탓이다.

뒤늦게나마 차가운 바람 덕분에 더 깊은 나락으로 끌고 가려는 삶과 사고의 관성 그리고 그 위험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 감사하다. 2018년 말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 때는 동일한 반성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 그리고 그 놈의 행복이란게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어디있는 녀석인지 찾아내야겠다.

행복, 이성, 사랑

“우리 그 때 행복했는데… 그치?”

나는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이긴 했던걸까. 이제서야 깨닫게 된 것이지만, 되돌아보면 난 그 때도 행복이나 사랑이 뭔지 몰랐던 것 같고 여전히 모르고 있는게 확실하다.

이제서야 드는 생각은, 행복이란건 무엇인지 정의되어야만 하는 개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의하려 하기 때문에 그 기준과 요건을 만족시켜야 하고, 그 기준이란 것 조차도 추상적인 탓에 또다른 정의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 아닐런지. 설령 그 기준을 만족시킨 무엇이 나타났다 한 들 이리저리 재보느라 행복을 행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나치고 경솔하게 내팽겨쳐 왔는지도 모르겠다.

더 안타까운 것은 행복하고는 싶지만 행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그에 당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낮은 탓인지 행복 추구에 대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심리에 갖혀 해결책도 모른채 정체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성(異性)을 만난다는 것도 비용과 리스크가 큰 모험일 뿐더러 상대방을 내 행복 추구를 위한 노력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싶지 않다보니 더 조심스럽다. 이런 내 생각을 이해해주면서도 내 존재 자체를 행복으로 여겨줄 수 있는 사람, 생각만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럼 사람…(이 내게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지만)

나는 하고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쉽지 갖추기 쉽지 않은 행복의 요인을 누리고 있음에도 내 안으로부터는 행복의 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성이라는 존재가 조금이나마 이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긴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관계지향적으로 만드셨다는 것이 이런 의미일까.

에로스와 아가페가 내 자신을 위해 어떠한 대가를 바라고 시작된 사랑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대상을 중심에 두는 사랑의 차이가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면, 궁극적인 아가페라는 것이 물론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겠지만서도, 난 그 의미에 한발짝도 다가서 있지 못한 것 같다.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경험들에 비춰 다분히 예상해볼 수 있는 어려움과 갈등들이 내게 너무 크게 보여서인지, 이런 심리적 장벽을 넘기 전에는 사랑이라는 것을 시작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 장벽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행복이란 화두

오늘도 어김없이 카페에 가는 길에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가족을 보면서, 추석이라고 나와있긴 하지만 오늘따라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힘든 것 아닐까 하는 삭막한 생각에 잠겨있다가, ‘저들은 지금 행복할까’하는 질문에 나도 모를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뭘 위해 이렇게 달려가고 있는걸까?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걸까?
종착점이 어디일지 모를 막연한 어딘가를 향해 분명 달려가고는 있지만, 그것이 내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건 아닐텐데. 어쩌면 행복은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것 아닐까.

행복이란건 기다림의 대상이 아니라 주변에서 찾아내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복으로 가장한 마약에 취하고 싶지는 않다. 행복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사실 행복이란, 별 것 아닌지도 모른다

소심하지 않고 대담하게, 그리고 눈치없이

생각해보면, 난 늘 누군가를 헤아려주고 이해해주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스스로를 여겨왔다는 편이 정직한 표현이겠다). 그런 탓에 감정을 표출하고 공감과 이해를 요청한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스스로의 본분을 망각하는 일일 뿐 아니라 내 스스로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내가 신이 아닌 이상에야 그것들이 필요한 때가 많았을텐데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기는 커녕 나의 상황을 알고 도우려는 손길마저도 거절했던 것 같고, 심지어는 거부감마저 들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나의 속마음을 터놓고 아무런 부담없이 감정을 표출할 수 있었던 대화 상대란 내게 존재할 수 없었다. 공감과 이해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한 사람이 곁에 있었다 해도 이건 내 마음의 벽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의 좁은 선입견 속엔 내 마음을 완벽하게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감정을 표출하면서도 동시에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야만 했고 결국 마음을 털어놓는 일 자체가 내게 피로로 다가와 더더욱 마음을 닫게 만들었다.

나에게 있어 나의 모든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하나님이었던 것은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어린 애 마냥 울어 제껴도 상관없었고, 되지도 않는 말이나 늘어놓다가 침흘리며 잠들어버려도 아무런 부담없이 멋쩍은 웃음 한 번 지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힘든 상황에 대해 내게 피부에 와 닿는 해결책을 보여주지 않으신다 해도 원망의 대상이 되기는 커녕, 주저리 주저리 내 마음을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게 큰 위로가 되셨다.

건방지게도 나는 이런 마음을 하나님만 의지하는 순수한 믿음인냥 여기고 있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관계 지향적인 존재로 지으신 이상 나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음에도 나 스스로를 고립시키고는 그것으로 내 자존심을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고독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위로를 갈망하고 있었던 내 본연의 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었으리라.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여전히 미성숙하고 어리숙하기 그지 없는 사람이다. 내가 기다렸던 것은 진정어린 공감과 이해, 그리고 그것을 함께 해 줄 사람이었음에도, 이제서야 감정을 표출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할 필요를 깨달은 탓에 마치 갓난아기가 의사표현의 방법을 몰라 그저 울어대는 것 마냥 빼액대고 있는 것 아닐까. 그나마도 지금까지의 관성 탓에 소심하게 드러내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나는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회사 문 앞에 투사되어 있는 문구처럼 ‘소심하지 않고 대담하게, 그리고 눈치없이’ 나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반대로 나에 대한 그러한 감정 표현도 잘 소화해 낼 수 있는 마음의 준비인 것 같다. 잘 해보자, 선호야. 화이팅.

끝나지 않은 고민 – 진정한 행복이란

나에게 있어 최근의 약 2년은 여러가지 사건들로 인해 여러가지 물리적, 심적 변화를 경험한 시간이었다. 짧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삶 중에서 손에 꼽을만한 의미있는 도전과 성취로 고무적인 순간들이 있었는가 하면, 종국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부질없는 개인사로 비용과 시간 그리고 감정을 허비해 버리기도 했고, 여러가지 가정사들도 겹쳐 있던 시기인지라 그 전까지의 나답지 않은 감정의 기복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제 막 여름의 끝물이 오는 시기에 연말같은 느낌의 글이라 이상하긴 하지만, 지난 비전트립 중 전도사님께서 제게 던지신 한마디가 한 달 내내 마음을 때렸다. ‘선호는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열심히 살고는 있는데 행복해 보이진 않는다’고. 과연 그런 것 같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부정하고 싶었던 자기 인식이었는지도 모르는 그 한마디가 이제 다음 인생의 숙제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행복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등의 주제를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레 ‘왜 행복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있노라면, 행복과 권리보다는 책임과 의무에만 큰 비중을 두고 살아왔나보다. 그래서 최근 2년 동안은 주변의 시선보다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감정이 가는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해보기도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해버리는 바람에 이것마저도 내가 발버둥 친다고 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다고 연애나 결혼을 해야 한다는 주변의 권유도 쉽사리 동의가 되지 않는다. 일종의 마약처럼 고민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어 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근원적인 행복에 대한 갈증과 외로움을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는 개인적인 기대 확률은 1% 이하다. 연애나 결혼이나 성공적인 만남의 가능성도 장담할 수 없는데 그 성공여부를 가려내기 위해 지난한 모험을 해야 할 뿐 아니라, 성공이라 생각하고 지속하는 만남마저도 후회스런 결말로 치닫는 경우들을 목격해서인지, 나로서는 배부른 소리처럼 들려서 자발적으로 뛰어들고 싶지 않은 게임이다(이런류의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멋진 여성이 적극적으로 대시해주면 모를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ㅋㅋ)

찬양의 고백처럼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나의 악한 본성이 여전히 살아 꿈틀대고 있으니 그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대체 행복이란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행복은 마냥 기다린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찾아 헤매야 할 문제 아닌가 싶은데, 가야 할 방향을 종잡지도 못하고 있으니 문제다. 이것이 종종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차 올라오는 한숨의 원인인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처럼, 나의 이러한 고민이 진정한 행복을 이해하기 위한 산고였으면 좋겠다. 언제쯤이나 해산의 순간이 오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