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Thoughts

끝나지 않은 고민 – 진정한 행복이란

나에게 있어 최근의 약 2년은 여러가지 사건들로 인해 여러가지 물리적, 심적 변화를 경험한 시간이었다. 짧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삶 중에서 손에 꼽을만한 의미있는 도전과 성취로 고무적인 순간들이 있었는가 하면, 종국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부질없는 개인사로 비용과 시간 그리고 감정을 허비해 버리기도 했고, 여러가지 가정사들도 겹쳐 있던 시기인지라 그 전까지의 나답지 않은 감정의 기복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제 막 여름의 끝물이 오는 시기에 연말같은 느낌의 글이라 이상하긴 하지만, 지난 비전트립 중 전도사님께서 제게 던지신 한마디가 한 달 내내 마음을 때렸다. ‘선호는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열심히 살고는 있는데 행복해 보이진 않는다’고. 과연 그런 것 같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부정하고 싶었던 자기 인식이었는지도 모르는 그 한마디가 이제 다음 인생의 숙제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행복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등의 주제를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레 ‘왜 행복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있노라면, 행복과 권리보다는 책임과 의무에만 큰 비중을 두고 살아왔나보다. 그래서 최근 2년 동안은 주변의 시선보다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감정이 가는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해보기도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해버리는 바람에 이것마저도 내가 발버둥 친다고 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다고 연애나 결혼을 해야 한다는 주변의 권유도 쉽사리 동의가 되지 않는다. 일종의 마약처럼 고민을 잠시나마 잊게 만들어 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근원적인 행복에 대한 갈증과 외로움을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는 개인적인 기대 확률은 1% 이하다. 연애나 결혼이나 성공적인 만남의 가능성도 장담할 수 없는데 그 성공여부를 가려내기 위해 지난한 모험을 해야 할 뿐 아니라, 성공이라 생각하고 지속하는 만남마저도 후회스런 결말로 치닫는 경우들을 목격해서인지, 나로서는 배부른 소리처럼 들려서 자발적으로 뛰어들고 싶지 않은 게임이다(이런류의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멋진 여성이 적극적으로 대시해주면 모를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ㅋㅋ)

찬양의 고백처럼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나의 악한 본성이 여전히 살아 꿈틀대고 있으니 그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대체 행복이란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행복은 마냥 기다린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찾아 헤매야 할 문제 아닌가 싶은데, 가야 할 방향을 종잡지도 못하고 있으니 문제다. 이것이 종종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차 올라오는 한숨의 원인인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처럼, 나의 이러한 고민이 진정한 행복을 이해하기 위한 산고였으면 좋겠다. 언제쯤이나 해산의 순간이 오게 될까.

출정 신고

2017년 4월 21일 솔트룩스 퇴사를 기해 나름의 소회를 남겼었는데, Phase 3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베이코리아 Data Analytics팀 입사, 2017.05.08. 


대기업에 입사하게 됐으니 잘 된 것이지 무슨 ‘Phase 3’니, ‘도전’이니 하는 거창한 말을 늘어놓는가 할테지만, 이제 그 이유와 개인적 의의에 대해 정리해 보려 한다. 그간 어디에서 어떤 경험을 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여러가지 고민들이 있었는데, 먼저 솔트룩스에서 퇴사하면 잃게 되는 기회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겠다. 

  1. 선도적인 연구 개발 주제 경험: 기술 투자 여력이 충분한 기업이 아니고서는 연구개발에 투자하기 쉽지 않지만 솔트룩스는 이런 면에서 상당한 추진 의지를 갖고 있고, 이것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식이기도 했기 때문에 다양한 기관/전문가들과 협업하면서 인공지능 관련 기술에 대해 어떤 니즈들이 있는지 또 어느 정도의 인식 또는 기술 수준에 있는지 등의 트렌드를 살펴보기에는 솔트룩스만한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2. 국제적 협업 기회: 담당 업무 중 많은 부분이 베트남 개발 지사와의 협업, 그리고 유럽을 중심으로 한 연구기관, 기업들과의 연구 과제 수행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하는 방식과 전문성에서 많은 자극을 받았고, 지속적으로 영어로 소통하는 환경에 노출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부가 소득이었다. 
  3. 시맨틱 기술 전문가로서의 성장: 최근 인공지능 기술이 각광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딥러닝만을 외치고 있지만, 딥러닝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 영역도 있겠으나 실제 도메인에서 작동되는 시스템 개발에 있어서는 시맨틱 기술의 결합이 필요한 경우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두 기술을 어떻게 결합해 나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과 연구를 해 나갈 수 있고 그 전문성/인력을 갖춘 기업은, 국내에서는 솔트룩스 외에 전무하다시피하다.
  4. 기업성장 가능성: 최근 인공지능 붐으로 인해 솔트룩스가 여러 기관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긍정적 평가를 받아 기업가치가 상승하고 있으며 IPO도 꾸준히 준비해 왔기 때문에,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위와 같은 이유로, 헤드헌터 제안들에 대해서도 왠만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거절해 왔었던 것 같다. 심지어 인터뷰에 응해서도 꼭 가고 싶어서 지원한 것이 아니라 나의 경험과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고 있는 중이라 말할 정도로, 다음 단계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왔다. 

나름 이곳저곳 인터뷰도 다녀보고 정보도 취합해 보고 하면서, 거의 최종 단계까지 진행된 곳도 있고 아예 서류전형이나 첫 번 면접에서부터 탈락한 경우들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이베이에 안착하기로 했다. 면접 중에 만일 최종단계까지 잘 진행이 되었을 때 이직 제안에 승락할 의사가 몇 퍼센트 정도 되는가 하는 질문(이 때도 그저 이직을 원해 지원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나 보다)에 대략 70% 정도라고 대답했었다. 많은 경우에 인공지능 기술이나 데이터 분석 등의 포지션에서는 시맨틱 기술 전문가가 낙찰될 가능성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만일 입사하게 되더라도 관련한 협업 환경이 없다면 혼자서 고군분투하거나 내 전문성을 활용한 시너지는 접어두고 데이터 엔지니어링과 분석 업무에 전념하게 될 것 같아 고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위에서 고려했던 1, 3번 기회를 버리게 되는 길이기도 했고, 관련 전문성을 다시 축적하고 활용하는 데까지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단기간에는 나 자신과 기업의 윈윈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전 글에 밝혔던 것처럼 B2B 업무를 위한 기술 개발보다는 B2C 서비스와 데이터에 대한 ‘기술 적용’ 경험에 목말라 있었던 터였고, 인터뷰 과정에서 면접관 분들로부터 ‘이 사람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보다도 ‘지원자의 역량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직 제안에 비교적 쉽게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이제 이직 절차를 마무리하고 입사하게 된 시점에서 나의 도전은, 다소 추상적이지만 크게 두가지를 들 수 있다. 

  1. 회사의 브랜드에 기대지 않은 채 스스로를 시맨틱 전문가로서 증명해 내고, 기존에 수행하지 않았던 창의적인 방식으로 실제적인 성과를 이루어 내는 것
  2. 기 보유 솔루션을 활용한, 다양하지만 얕은 경험 탓에 깊지 않은 기술 숙련도를 단기간에 빠르게 끌어 올리고 활용하는 것

이 둘을 생각해보건데, 앞서 나열한 솔트룩스에서의 기회들은 나의 전문성이 아닌 회사의 역량에 기댄 소극적 생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솔트룩스에서는 전체적으로 기술 트렌드를 조사/연구하고 내재화하는 것 자체가 업무의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의미있는 Phase 3가 되기 위해서는 솔트룩스에서 해오던 역할들은 물론이고 서비스에 대한 기술 적용 제안과 실행까지 해내야 하는 매우 도전적이고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한 업무가 될 것 같다. 

몇 년 후에 이 글을 다시 읽게 되었을 때, 나는 내 스스로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게 될까. 

2017-04-21, Phase #3

내 인생의 Phase 1을 학창시절(대학원 시절까지)이라고 한다면, Phase 2는 솔트룩에서의 근무기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햇수에 비해 여러가지 고뇌와 삶의 변화가 있었던 시기다.

이제 Phase 3의 문 앞에 서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솔트룩스에서 퇴사한 것. 아직까지 처리하고 나와야 할 업무가 남아 있어 아직까지는 홀가분한 맘이 덜하긴 하지만, 어쨌든 사회적 신분상으론 자연인인 상태다.

2011년 3월, 박사 과정 중 좀처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론의 세계에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해보겠노라고  주변의 만류도 뿌리친 채 박사 학위를 마치지도 않고 무작정 회사를 지원해 솔트룩스에 입사했던 그 때를 돌아보게 된다.

지금은 이사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회의실에서의 면접, 그리고 개발능력 테스트 때 잠시 머물러 있던 사무실의 묘한 느낌이 아직도 생각나고, 입사하자마자 유럽협력 연구과제에 투입되어 헤매고 밤새던 그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6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학교에만 갖혀 있던 그 때는 몰랐던, 성실함만으로는 되지 않는 냉정한 세계를 조금씩 경험하면서 스스로의 전문성에 대한 갈등, 우주에 의미있는 작은 흔적이라도 내보고 싶은 욕심이 뒤섞이게 되었던 것 같다. 박사과정도 다시 마무리해보겠다고 제자의 외도에도 늘 격려해주시던 교수님께 다시 지도를 부탁드리기도 하고, 나만의 사업을 생각하며 부끄럽기 그지없는 어줍잖은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2017년 4월 21일, 여러 고민 끝에 다음 단계에 발을 들이밀고 도전해보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기고야 말았다.

스스로의 전문성에 대해 늘 부족함과 모종의 자괴감(?)을 느껴왔는데, 근무 기간이 축적됨에 따라 점차 관리 업무를 맡게 되고, 그런 업무의 특성상 최근 인공지능의 붐을 타고 한창 유명세를 타고 있는 회사의 브랜드를 등에 업은 채 고객을 만나면서 그러한 부담이 가중되었던 것 같다. 게다가 매출의 대부분이 B2B라는 사업 특성상 결국 다른 기관을 위한 서비스와 시스템 구축을 수행하고 또 다른 기관의 사업 수주를 위해 그 브랜드를 더 공고히 해야 하는 일의 반복 속에서, 아직은 축적해 둔 내공이 미천한 탓인지 스스로의 기술부채 문제를 해결하는데 체력적 한계에 부딪히게 된 것 같다.

이제 30대 중반 밖에 되지 않은 이제 막 초보 딱지를 떼어낸 젊은이가 어설픈 전문가 놀이에 뛰어들려 했던 것은 아닌지. 이제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서 자신을 다듬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의 여정에서 Phase 2가 격변의 시기였다면, Phase 3는 모험과 도전의 시기가 될 것 같다. 이제 새로운 환경에서 나 자신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Phase 4를 위해 견고한 기초를 놓아야 할 때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나는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에 구체적인 진전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저 살아내기에 급급한 나머지 자기 합리화에 빠져버리지 않고, 내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고 추구하기 위한 시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감성이 이끄는 이성, 그리고 과학

최근에는 조금 변화가 있었던 듯도 싶지만 (간소화된 MBTI라 정확하지는 않았을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나의 MBTI 결과는 ISFP와 ISTP 두 가지 양상을 보였다. I, S, P 는 명확한 성향을 보였으나 F와 P는 중간 (0이 중간 지점이라고 했을 때 정확하게는 F가 1점)이었고, 나름 이 성향에 대한 ‘부심’이 있었다.

사실 부심이라 해봐야 별 것 없었다. 나는 감성(F)과 이성(T)을 내가 원하는 때에 조절할 수 있거나 동시에 향유할 수 있는, 예를 들어 영화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저 부분은 뭔가 연출이 이상한데..’라고 비평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정도였다. 어쩌면 별로 특출날 것 없는 나를 선전하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합리적인 판단이 요구될 때는 이런 성향을 십분 발휘하여 ‘감정을 절제하고 이성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겨왔다. 아니, 그렇게 보이길 원했다는 편이 더 정직한 표현 아닌가 싶다. 평소에는 감성적이지만 결단이 필요할 때는 이성적으로 절제할 줄 아는 남자. 멋지지 않은가.

그러나 나의 행적들을 돌아보고 사람에 대해 고찰해보면서 깨닫게 된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이성과 감성이 따로 놀 수 없는 동물이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이성적으로 행동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감정이 먼저 앞서고 이를 이성으로 포장하여 그럴듯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거나 해석해서 자신을 학습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인 것 같다. 이런 양태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고, 오히려 이러한 기전이 없다면 사람은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살지도 모른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객관성과 이성적 판단의 산물처럼 여겨지는 과학의 역사조차도 ‘의심’과 ‘믿음’이라는 감성으로 점철되어 있다. 과학적 사고의 시작은 ‘당연하게 보이는 것을 의심’하는데서 시작하고, 이 의심을 ‘가설’이라는 이름의 믿음으로 상정한 뒤 이것이 증명될 때까지 꾸준한 믿음을 갖고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증거를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이다. 혹시 자신의 믿음과 배치되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쉽게 인정하지 않고 긍정적 실마리가 보일 때까지 끈기있게 파고들어 상식을 깨는 놀라운 증거를 발견해내는 과학자일수록 칭송을 받게 된다. 이것이 내가 과학적 사고를 가장 고상한 기준으로 여기지 않는 이유이다. 과학적 사고는 ‘방법론’일 뿐 그 방법론을 활용하는 주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일 과학자들이 통계와 데이터에 근거해서 객관성(인 것처럼 보이는)만을 받아들이는 이성적 사고만이 작용했다면 현대의 과학적 발전은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컴퓨터가 ‘decision supporting’은 몰라도 ‘decision making’은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물론 알고리즘이라는 것 자체가 사람의 사고를 반영하고는 있지만, 사람의 다양한 감성적 의지라는 복잡한 패턴을 구현해내기란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아직까지는 요원한 일이다).

새로운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잡는 것은 감성적 의지다. 그 의지를 다잡기 위해 사람들은 환경 분석이라는 이성적 데이터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들이밀지만 결국 그것은 나의 감성을 북돋고 용기를 얻고자 하는 마음의 표출 아닐까. 이런 때 일수록 지금의 또 다른 감정을 기회로 여겨 이탈하기 보다는, 내가 느꼈던 과거의 감성적 의지를 다시금 다잡아 현재에 충실하고 목표한 것을 성취해내는 것이야말로 과학적 가설에 대한 태도와 같은 이성적 판단이라고 부를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커플의 성생활 패턴 데이터를 시각화한 전시물. 감성이 데이터(이성)를 만들어 내고 또 다른 감성을 만들어낸 재밌는 사례다. 음.. 이 글의 취지와 그리 상관없는 이상한 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그냥 한 번 올려보고 싶었던 나의 감성적 의지가 발현된 것 뿐이다 – 출처: BigBangData>

8,500원 때문에 당한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경험

카페에서 일을 하다 저녁 식사시간이 되어 뭘 먹을까 고민하며 돌아다니다가, 부대찌개가 눈에 띄이길래 오랜만에 먹어보기로 했다. 간혹 1인은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6000원짜리 제육정식도 팔고 있어서 괜찮으려니 하고 들어갔다.

 

나: "1인 메뉴 가능한 것 뭐가 있을까요?"

직원: "찌개밖에 없어요. 사리 넣어드릴까요?"

나: "제육정식은 점심만 되는건가요?"

직원: "(딴청부리면서) 바쁠 땐 안해요"

나: "네 사리 넣어서 주세요"

 

바쁠 땐 안된다니.. (사람도 거의 없었다, 총 5명 정도?) 어이가 없었지만, 어쨌든 처음에 찌개를 생각하고 들어온 거니 기분좋게 먹고 나가자, 했다.

식사를 마치고.. 

프론트에 가도 직원이 계산을 할 생각을 하질 않는다. 뭐 못볼 수도 있고 이런 경우야 많으니, 친절하게도(?) 직원을 호출했다.

 

나: "계산이요!"

 

체크카드를 제시하고는 평소처럼 "영수증은 버려주세요" 하고 나왔는데 뒤에서 직원이 부른다.

 

직원: "잔액 부족이라고 떠요"

 

아뿔싸.. 이번 달 생활비를 소비통장에 넣어놓질 않았더니 잔액이 부족한 모양이다. 카드사용 통지 문자를 보니 잔액이 4,500원만 남아있다.

 

나: "아 그래요? 제 차가 이마트 쪽에 (걸어서 약 3-4분거리) 있는데, 카드를 가져와도 될까요?"

직원: "점장님한테 물어봐야 하는데.."

 

잠시 후에 점장이 와서 이상한 표정으로 훑어보더니.. 시선이 핸드폰에서 갑자기 멈추고는, 한다는 말이 가관이다 (시선이 멈춘 순간 직감했다).

 

점장: "핸드폰을 놓고 가세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는 형식적으로 붙인 말이고, 거기에 웃기까지 한다.

만일 '저희도 이런 경우가 많아서 죄송하지만 뭔가 맡겨 놓고 가거나 연락처를 주시거나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정도로 얘기했다면 충분히 그럴 의사가 있었다 (사실 내가 먼저 핸드폰을 맡길 생각을 했으니까). 그런데 점장의 시선처리나 말투/표정을 보고는 순간 마음이 굳어버렸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핸드폰을 던져두듯 하고 카드를 가지러 나와버렸다. 핸드폰을 '맡겨 두는' 것도 아니고, '놓고' 가라니. 표현을 해도.. 

카드를 가지러 갔다 오는 길에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신뢰가 무너진 세상이니 어쩔 수 없는 걸까. 내가 점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8,500원 도둑 맞을까봐 손님을 기분나쁘게 할 바에야, 돈 떼어먹고 도망갈 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면 그냥 보내주는 편이 장사하는 입장에서도 더 나은 방법 아닌가?'

한숨이 나온다. 카드 결제하고는 한마디 하고 나오리라. 그래도 최소한 나를 믿지 못하고 보냈다는 것에 어느정도 미안한 마음은 갖고 있겠지. 

음식점에 도착해서 프론트에 갔는데, 점장은 저 쪽 테이블에서 뭔가 손질하고 있었던지 누가 왔는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는다. 내가 아니라 손님이 왔을 수도 있는데?

점장은 나를 보자마자 계산할 생각부터 하고는 POS를 들여다본다. 

점점 더 기가 막혔다.

 

나: "핸드폰부터 주시죠"

점장: "(핸드폰 내밀면서) 뭐 드셨어요?"

나: "하.. 찌개에 사리 하나 먹었어요. 앞으로 여기 올 일 없을 겁니다."

 

소심하게, 그러나 분명한 소리로 한마디 했는데 짐짓 못 들은 체 한다.

 

점장: "8,500원입니다."

 

설마, 아까 내 말을 못들은거겠지. 난 그저 사과 한마디 듣고 싶었던 건데.

 

나: "앞으로 여기 올 일 없을 겁니다"

점장: "…"

나: "상식적으로 제가 돈을 떼어 먹을 생각을 했으면 그냥 몰래 나갔지, 직원분을 불러서 계산해달라고 했겠습니까? 앞으로 여기 올 일 없을 겁니다"

점장: "네"

 

'네' 라고…?!@?#

심지어 '어린 놈이 왜 진상이야'라고 말하는 듯한 희미한 웃음까지 입가에 번진다. 정말 화가 나서 더 있다가는 자제를 못할 것 같아 얼른 뛰쳐나왔다. (소심한 놈 같으니..)

그러고는 다시 카페에 일하러 와서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쨌든 잔액을 확인하지 못했으니 내게도 잘못이 있지만, 이렇게까지 불신을 가정하고 살아가야 하는 사회였던가 싶고, 그보다도 점장의 태도가 매우 불쾌하다. 일단 사건의 발단부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시선이나, 돈만 받아내고 보내면 된다는 듯한 태도 (계산할 때는 가소롭다는 듯한 의미심장한 웃음을 띄고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화를 돋구는 특기가 있나보다.

일개 시민이 이 글을 인터넷 한 구석에 올렸다고 그 점장이나 놀부부대찌개 본사에서 눈 꿈쩍이야 하겠느냐만은 (발견도 못하겠지만), 고객 하나는 확실하게 잃었다. 날 그저 8,500원짜리로 봤다면 당신들, 실수한거야.

 

 


부연

제가 1차 원인 제공자임이 분명함에도 단순히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쾌감을 토로한다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어떤 분들은 이 글을 보면서 '당신이 잘못 해놓고는.. 성격 이상하네'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관계만 놓고 보면 옳은 지적이고 과민한 반응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제가 불쾌감을 느낀 것은 점장의 태도입니다.

초반 대응에서 표정이나 말투 등에서 돈을 떼어먹고 도망갈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듯한 의심의 눈초리를 여과없이 드러낸 시점에서 이미 마음이 상했는데, 결제하러 돌아가서의 점장의 대응으로 볼 때도 매뉴얼 대로 대응했던 것이 아닌 여전히 '돈'에만 초점이 있었다는 것을 재확인하고는 더더욱 그 태도를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처음보는 손님이니 당연히 못미더울 수 있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그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응 절차대로 수행하는 것과 수행하는 태도나 마음의 문제는 별개이니까요.  

그저 불평글 하나 올렸을 뿐인데  페이스북을 타고 전혀 예상치 못한 조회 수를 보이고 있어서, 오해의 여지도 충분한 글인데 여파가 커지는 것 같아 조금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해서 부연 글을 남겨봅니다.

원탁 회의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아하덕규, '가시나무' 중에서

 

나는 좀처럼 확신에 찬 단어나 표현은 잘 내뱉지 않는 편이다.

척박한 사회 생활에서도 가능하면 절제하고 의견의 관철을 위해 꼭 필요할 때에 한해서 조심스레 사용하는 편이다.

 

너도 옳고, 너도 옳다 황희 정승

 

진리는 존재하겠지만, 그 진리가 무엇인지 누구인들 그 실체를 알고 확답할 수 있으랴.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당신도 옳고, 또 저 관점에선 당신도 옳은 법이고, 한가지 일에도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데..

이런 면에서 간혹 보이는 '진실을 요구한다'는 시위 문구처럼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요구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다 보니 나의 내면에서도 여러가지 가능성, 관점들을 놓고 지리한 회의를 거치게 되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것도 많지만 최종 선택에 대해 늘 아쉬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인가…

 

미국의 동성결혼 합헌 결정에 대한 한마디

이번 동성결혼 합헌 결정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기독교계와 찬성자 양 쪽 모두에 한마디씩 하고 싶다. (욕만 먹고 본전도 못찾을 글을 맘 속에 접어두지 못하고 한참 쓰고 있는 것 보면 나도 참 어지간한 놈이다..)

'허용'과 '옳음'의 기준이나 관점은 다르다. 동성애자 결혼이 합법화된 것은 그들의 선택의 자유가 보장된 것이지 그것이 옳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죄를 짓는 것도 자유이고 권리다. 그리고 그 자유의 권리의 결과가 '옳음'의 기준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본인의 선택이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 66권을 통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과거/현재/미래이고, 자유의지가 주어진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결정이다. 이번 결정이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의 부당한 태도를 개선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결정에는 pros와 cons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어쨌든 이런 의미에서의 자유와 권리의 보장이라면 사실 이번 동성애 합법화가 기독교적 입장에서도 큰 충격일 이유가 없다. 오히려 기독교의 부당한 차별적 태도가 낳은 결과라는 측면에 보면, 적반하장적인 태도에 가깝다. 크리스천이 해야할 일은 이번 결정에 반대 운동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모든 사람들을 섬기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옳음을 주장하는 방법은 이런 식의 반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는 것으로 증명해야 한다. 이번 합헌 결정으로 동성애가 더 확산될까? 아니다. 원래 그랬고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양으로 드러나는 것 뿐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번 결정의 찬성 입장에서의 태도나 발언에도 아쉬움이 많다. 이번 결정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적 태도 또한 그들이 비판하는 기독교계의 잘못된 태도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만의 '옳음'을 강요하는 태도가 기독교의 그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것은 나 뿐인걸까. 

'옳음'을 사람이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이지만, 어떤 '옳음'을 선택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느 한 쪽을 강요할 수 없다. 기독교의 구원 과정에서의 중생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타의에 의해 강요된다고 해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번 결정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들 입장에서 그 옳음은 사람들이 합의하고 만들어 가야한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사람이 그 의견에 찬성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는 일부에서 우려하는 동성애 반대 발언에 대한 처벌과 같은 발상이나 적용으로 확장되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아무튼, 이번 결정에 '사랑이 이겼다'는 식의 피켓은 나에게 있어서는 마치 '동성애는 죄'라는 문구의 피켓과 같은 비슷한 부정적 느낌마저 들게 만든다. 그러한 멘트는 각자의 입장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왜곡된 시각이나 선입견을 갖게 만드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그들이 정의하는 사랑이다. 생각같아서는 내 SNS 프로필에 무지개를 반쪽만 넣어볼까 했는데, 이것도 오해만 불러일으킬 것 같아 참기로 했다. 

 

29F72AE700000578-3140610-LET_THE_STREET_PARTIES_BEGIN_Gay_marriage_is_now_legal_in_all_50-a-3_1435350708737

(이미지 출처: http://www.dailymail.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