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가?

제목이 좀 과격한지 모르겠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그를 따르는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기도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 던져보고 싶은 화두는, '기도의 능력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앞서 언급한 '크리스천'들의 기도에 대한 인식과 삶의 태도에 대한 문제를 짚어보려 한다.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기 전에, '기획(planning)'과 '개발(development)'의 관계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왠 뚱딴지 같은 말인가 하겠지만, 차차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기획'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 그 대상의 변화를 가져올 목적을 확인하고, 그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행동을 설계하는 것

을 말한다. 또, 개발은 백과사전에 아래와 같이 정의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보다 쓸모있거나 향상된 상태로 변화시키는 행위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기획이 무엇인가를 '의도'하는 것이라면, 개발은 그 의도를 실현해내는 구체적 '행위'를 의미한다고 간추려볼 수 있겠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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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는 기획과 결과 외에, 아이디어를 포함했다. 필자의 글 중 전략적 직관과 연결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는데, 여기서는 기획에 포함될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연결할 설명을 위해 분리했다. 핵심은, 적절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기획하고, 개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위 그림을 크리스천의 기도에 대한 도식과 매칭시켜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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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에 대한 몇가지 오해

불과 20여년전만 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하는 것은 이단 시비가 있을 정도로 화제가 될만한 표현이었다. 특히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가르친다는 예수전도단(YWAM)의 획기적인(?) 발상이 그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내가 예수전도단에 들어가게 되었던 계기가 생각난다. 교회에 예수전도단에서 활동하던 선배가 한 명 있었는데,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쯤 예수전도단에 들어가라는 권유를 받았고, 왜 예수전도단이냐라는 질문에 그 선배가 했던 대답은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가르쳐준다' 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단 한마디에 예수전도단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그만큼 '하나님이 진리인가', '정말 살아계시는가'에 대한 확인을 할 수 있지 않겠나라는 기대감, 단순히 그 이유 하나로 개강일도 아닌 입학식날 예수전도단 동아리방에 올라가 등록해버렸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에 대한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한 갈급함과 탐구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따라 사는 것에 대한 반발이 예전만하지는 않은 듯하다. 여전히 거부감이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갖고 있는 교단이나 단체들도 있지만, 이제 많은 교회들이 그 분의 음성을 따라 살고자 하는 갈망을 갖고 있고, 가르치고 있다. 또 동시에 이러한 방식이 교역자들뿐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언할 수 있다'로 확산되고 있다.

나 또한 이러한 움직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누구보다 크게 동의하며 이를 권면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삶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태도들이 있지 않은가 하여 이를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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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의 감각 (전략적 직관) vs. 하나님의 음성 듣기

제7의 감각윌리엄 더건, 비즈니스맵, 2008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사는 삶

소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갈망하는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고민해봤음직한 주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에 '직통 계시'라는 표현을 섞어 비판적으로 말하는 크리스쳔이라도 '기도하는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던지, '이러이러한 성경구절이 생각났다'던지 하는 표현은 흔하게 사용하는데 표현만 다를뿐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음성 또는 계시'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에 대한 책들도 많이 나와있다. 키워드로만 검색해도 무수하게 나올 정도다.

이와 관련된 대부분의 책들을 요약해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뜻대로 사는 삶은 아래와 같이 요약해볼 수 있을 것이다.

  1. 평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라.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것)
  2. 음성을 듣기 전에 나의 생각을 내려놓아라. (통상 어둠의 영이 나에게 말하는 것을 대적하는 것을 포함한다)
  3. 그 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라.
  4. 말씀하신 것에 즉각 순종하라.

다음 얘기를 진행하기 전에, 먼저 아래의 글을 읽어보길 바란다.

  1. 역사적 사례를 충분히 공부하라 (기억의 선반에 저장해두라)
  2. 냉철함을 유지하라 (우리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대와 이전의 생각들을 머릿 속에서 깨끗이 지워라)
  3. 섬광 같은 통찰력
  4. 결단력 (결심, 결의, 의지, 추진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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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회복

열매 맺는 나무와 선악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먹기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들을 그 곳에서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창 2:9, 쉬운 성경
 묵상하는 동안 '열매'로부터는 '성령의 열매'를, '나무'로부터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가 떠올랐다. 그러나, 에덴동산에는 다를 나무들 뿐 아니라,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같이 있었다. 이것이 지금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성령의 열매 중에도 선악과가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맺게 하신 열매가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나의 의로 취하기 시작할 때 그것이 선악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상상해본다면, 어쩌면 에덴 동산의 선악과 열매도 그냥 보통의 열매와 같은 것이지만 (선악과 種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선정해서 선악과로 삼으셨을지도 모르겠다. 즉, 지금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많은 것들 중에 하나님을 계속해서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가지를 선정해서 선악과와 같이 삼으실 수 있다고 뜻이다.

 

생명나무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아 내시고 생명나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은혜로 주어진 은사(gift)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맺게 하신 '열매'자체에 나의 관심을 집중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면, 생명나무에서 멀어질 수 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비전 성경사전에 따르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상징한다. 생명나무는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 하셨다. 모든 열매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음에도, 내가 선악과를 취한다면 (나의 의로 여긴다면) 예수님을 아는 삶을 잃어 버리게 될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와 같이, 그를 깊이 알아갈 기회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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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과 하나님의 관점

올바른 비판은..

동양 철학의 주장들은 다원주의나 범신론 등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경향이 많고, 기독교의 배타성에 대해 공격하는 강력한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또, 동양에 서양의 문물들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서양에도 동양의 문화와 사상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점은 더욱 강력한 무기로 역수입될 가능성이 다분하고 일부 그러한 현상들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내가 볼 때(후에 얘기하겠지만), 기독교의 입장에서 이러한 사상에 대해 진정으로 우려를 표명하려면, 동양 철학의 수용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잘 분별하여 비판해야 한다. 또 보다 적극적으로는 이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어떠한지 더 잘 이해하여 전도의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기독교 내에서도 동양 철학의 일부만을 보고 무조건 배타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인정한다면, 동양철학 내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행하심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양철학이나 한의학, 음양오행을 전공하지 않은 자임에도, 또 신학자가 아님에도 그 전부터 이러한 주제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파악하고 싶은 것이 나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러나 전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에 대한 판단을 계속 미뤄왔으나, 시도하는 자가 없어 답답했고 정확한 결론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글을 시도함으로써 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기회가 될 것 같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숙하나마 한의학 동양철학에 대한 책을 읽고 이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서술해보고자 한다. 이는 분명 쉽지 않은 시도이고, 자칫 위험(?)한 시도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것은 잃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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