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 반대’에 반대하며 (1/6)

민감한 주제의 글을 시작하며

일단 이 글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

‘인권’의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는 요즘, 특히 필자가 일하고 있는 IT 분야에서는 더더욱 글로벌 기업들의 CEO들이 서로 나서서 인권문제에 대한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있으며(미국의 경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직원들이 더 반발하는 비즈니스적 문제도 있을 정도), 더 직접적으로는 필자의 회사는 LGBTQ+ 인식개선이나 Diversity, Inclusion과 같은 주제를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런만큼 필자의 주변에는 이러한 시각에 찬동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기에, 동성애 등 민감한 주제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을 밝히는 것이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다. 동시에,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지도교수님으로부터 신학의 길을 권유받을 만큼(지금 돌이켜봐도 꽤나 진지하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진지한 기독교인으로 살아왔던 필자로서는 자칫 교회의 주장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의견을 드러내는 것도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양쪽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할 것 같은 이런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여러 논란 속에서 교회 공동체에서 만나게 되는 젊은 세대들(특히 청소년기 학생들)의 혼란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윗세대들의 막연한 편견과 비논리적 비판(비난에 가까운)들을 실제적으로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고등부 교사로 봉사하고 있는 필자의 제자들 중 일부가 일부 교회의 태도나 이 주제에 대한 어른들과의 불통에 큰 불만을 품고 있어, 이들과 어떻게 대화하고 교육할 것인가의 문제는 실제로 닥친 현안이기도 하다.

그리고 필자 자신을 위해서도 기독교 신앙의 견지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입장을 정리해야만 했다. 또한 이것이 비단 필자의 주변에서만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라 세대간 갈등, 나아가 정치적 대립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음에도(그 중심에 일부 기독교인들의 움직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모두가 대립각만 세우고 있을 뿐, 균형잡힌 시각으로 논의해가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아 답답한 탓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양측 서로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고 더욱 대립의 극단으로 치닫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금이라도 동성애를 옹호하는 편의 선에 서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행위는 교회 입장에서 ‘영적 이해가 없는’ 또는 ‘진리를 희석시키고 타협하는’ 행위로 치부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반대로 차별금지법을 우려하는 기독교의 시선을 ‘신의 이름으로 인권을 무시하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종교로 여겨지기 십상이며 이는 (당연하게도) 교회 거부, 증오, 이탈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대립은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온갖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교회가 나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심층적으로 다루고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흑백논리식의 논쟁이 아니라 ‘신앙의 한계 아래서의 이성’을 충분히 발휘한 분석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안타깝게도 최근 교회의 태도는 온갖 논리적 오류들이 뒤섞여 차근차근 분석하고 고찰해보지 않으면 무엇이 고수해야 할 신앙의 영역인지, 근거없는 잘못된 주장인지, 충분한 신학적 고찰없이 거부감에만 초점을 맞춘 태도인지 분별하기 힘들 정도다. 필자가 신학 전공자도 아니며 LGBTQ+에 대한 깊은 지식이나 이해를 갖춘 것도 아니면서 이런 글을 작성해보고 있는 것은, 최소한 자극적인 대립 분위기에 휩쓸리는 대신 나름의 신앙적 양심과 합리적 사고를 기반으로 이런 문제를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차별금지법 반대’에 반대하며

1) 민감한 주제의 글을 시작하며
2) ‘행위’에 초점을 맞춘, 그 부실한 근거
3) 우리는 ‘은혜입은 죄인’이다
4) ‘죄성’에 대하여
5) 성에 대한 성경적 관점, 그리고 교육의 문제
6) 동성애 문제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

은사와 나눔

비주얼바이블 사도행전편을 보다가, 재밌는 점을 발견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 사도행전 2장 43~47절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이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방언, 예언, 치유 등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물건을 통용하고, 나눠 주고, 모이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 재밌는 것은, 3장이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 사도행전 3장 1~10절

 

성도 간의 '나눔'이 아직 성도가 아닌 사람에게도 '나눔'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뭔가 신령한(?) 은사를 보이려 했거나 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의식적으로 드러내려 했거나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연스러운 나눔 그 자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의도는 베드로의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베드로가 나누어 준 그것은, 마음을 다잡으면서, 믿음을 다시 새롭게 하고, 의식적으로 은사를 발현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미 예수님이 그들에게 먼저 나누어 주신 것을 그대로 흘려 보낸 매우 자연스럽고 지극히 당연한 삶의 방식이었을 뿐이다.

고린도전서 13, 14장에서 보여주는 사도바울의 통찰, 즉 '사랑' 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

 

어제 방영된 '백년의 전설, 단언컨대' 에서는 한국에서의 '뱃지'의 의미와 양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주고, 결론적으로 미래의 뱃지는 '착한 뱃지', 그 중에서도 나눔이 중요한 키워드로 언급되었다. 특히 인요한 세브란스병원 소장은 기독교의 구제가 전체 헌금액의 2%에도 못미친다는 점을 언급하기도 했다.

크리스천들의 은사는 교회 안에 머물러서 그들끼리의 파티에 사용되기 위한 어떤 Object나 Phenomen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흘려보내는 Action이나 Process에 가까운 의미가 아닐까.

 

 

교회의 회복

열매 맺는 나무와 선악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먹기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들을 그 곳에서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창 2:9, 쉬운 성경
 묵상하는 동안 '열매'로부터는 '성령의 열매'를, '나무'로부터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가 떠올랐다. 그러나, 에덴동산에는 다를 나무들 뿐 아니라,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같이 있었다. 이것이 지금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성령의 열매 중에도 선악과가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맺게 하신 열매가 불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나의 의로 취하기 시작할 때 그것이 선악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상상해본다면, 어쩌면 에덴 동산의 선악과 열매도 그냥 보통의 열매와 같은 것이지만 (선악과 種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선정해서 선악과로 삼으셨을지도 모르겠다. 즉, 지금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많은 것들 중에 하나님을 계속해서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가지를 선정해서 선악과와 같이 삼으실 수 있다고 뜻이다.

 

생명나무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아 내시고 생명나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은혜로 주어진 은사(gift)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맺게 하신 '열매'자체에 나의 관심을 집중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면, 생명나무에서 멀어질 수 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비전 성경사전에 따르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상징한다. 생명나무는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 하셨다. 모든 열매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음에도, 내가 선악과를 취한다면 (나의 의로 여긴다면) 예수님을 아는 삶을 잃어 버리게 될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와 같이, 그를 깊이 알아갈 기회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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