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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이성, 사랑

“우리 그 때 행복했는데… 그치?”

나는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이긴 했던걸까. 이제서야 깨닫게 된 것이지만, 되돌아보면 난 그 때도 행복이나 사랑이 뭔지 몰랐던 것 같고 여전히 모르고 있는게 확실하다.

이제서야 드는 생각은, 행복이란건 무엇인지 정의되어야만 하는 개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의하려 하기 때문에 그 기준과 요건을 만족시켜야 하고, 그 기준이란 것 조차도 추상적인 탓에 또다른 정의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 아닐런지. 설령 그 기준을 만족시킨 무엇이 나타났다 한 들 이리저리 재보느라 행복을 행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나치고 경솔하게 내팽겨쳐 왔는지도 모르겠다.

더 안타까운 것은 행복하고는 싶지만 행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그에 당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낮은 탓인지 행복 추구에 대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심리에 갖혀 해결책도 모른채 정체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성(異性)을 만난다는 것도 비용과 리스크가 큰 모험일 뿐더러 상대방을 내 행복 추구를 위한 노력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싶지 않다보니 더 조심스럽다. 이런 내 생각을 이해해주면서도 내 존재 자체를 행복으로 여겨줄 수 있는 사람, 생각만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럼 사람…(이 내게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지만)

나는 하고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쉽지 갖추기 쉽지 않은 행복의 요인을 누리고 있음에도 내 안으로부터는 행복의 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성이라는 존재가 조금이나마 이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긴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관계지향적으로 만드셨다는 것이 이런 의미일까.

에로스와 아가페가 내 자신을 위해 어떠한 대가를 바라고 시작된 사랑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대상을 중심에 두는 사랑의 차이가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면, 궁극적인 아가페라는 것이 물론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겠지만서도, 난 그 의미에 한발짝도 다가서 있지 못한 것 같다.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경험들에 비춰 다분히 예상해볼 수 있는 어려움과 갈등들이 내게 너무 크게 보여서인지, 이런 심리적 장벽을 넘기 전에는 사랑이라는 것을 시작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 장벽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감성이 이끄는 이성, 그리고 과학

최근에는 조금 변화가 있었던 듯도 싶지만 (간소화된 MBTI라 정확하지는 않았을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나의 MBTI 결과는 ISFP와 ISTP 두 가지 양상을 보였다. I, S, P 는 명확한 성향을 보였으나 F와 P는 중간 (0이 중간 지점이라고 했을 때 정확하게는 F가 1점)이었고, 나름 이 성향에 대한 ‘부심’이 있었다.

사실 부심이라 해봐야 별 것 없었다. 나는 감성(F)과 이성(T)을 내가 원하는 때에 조절할 수 있거나 동시에 향유할 수 있는, 예를 들어 영화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저 부분은 뭔가 연출이 이상한데..’라고 비평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정도였다. 어쩌면 별로 특출날 것 없는 나를 선전하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합리적인 판단이 요구될 때는 이런 성향을 십분 발휘하여 ‘감정을 절제하고 이성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겨왔다. 아니, 그렇게 보이길 원했다는 편이 더 정직한 표현 아닌가 싶다. 평소에는 감성적이지만 결단이 필요할 때는 이성적으로 절제할 줄 아는 남자. 멋지지 않은가.

그러나 나의 행적들을 돌아보고 사람에 대해 고찰해보면서 깨닫게 된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이성과 감성이 따로 놀 수 없는 동물이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이성적으로 행동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감정이 먼저 앞서고 이를 이성으로 포장하여 그럴듯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거나 해석해서 자신을 학습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인 것 같다. 이런 양태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고, 오히려 이러한 기전이 없다면 사람은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살지도 모른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객관성과 이성적 판단의 산물처럼 여겨지는 과학의 역사조차도 ‘의심’과 ‘믿음’이라는 감성으로 점철되어 있다. 과학적 사고의 시작은 ‘당연하게 보이는 것을 의심’하는데서 시작하고, 이 의심을 ‘가설’이라는 이름의 믿음으로 상정한 뒤 이것이 증명될 때까지 꾸준한 믿음을 갖고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증거를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이다. 혹시 자신의 믿음과 배치되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쉽게 인정하지 않고 긍정적 실마리가 보일 때까지 끈기있게 파고들어 상식을 깨는 놀라운 증거를 발견해내는 과학자일수록 칭송을 받게 된다. 이것이 내가 과학적 사고를 가장 고상한 기준으로 여기지 않는 이유이다. 과학적 사고는 ‘방법론’일 뿐 그 방법론을 활용하는 주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일 과학자들이 통계와 데이터에 근거해서 객관성(인 것처럼 보이는)만을 받아들이는 이성적 사고만이 작용했다면 현대의 과학적 발전은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컴퓨터가 ‘decision supporting’은 몰라도 ‘decision making’은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물론 알고리즘이라는 것 자체가 사람의 사고를 반영하고는 있지만, 사람의 다양한 감성적 의지라는 복잡한 패턴을 구현해내기란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아직까지는 요원한 일이다).

새로운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잡는 것은 감성적 의지다. 그 의지를 다잡기 위해 사람들은 환경 분석이라는 이성적 데이터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들이밀지만 결국 그것은 나의 감성을 북돋고 용기를 얻고자 하는 마음의 표출 아닐까. 이런 때 일수록 지금의 또 다른 감정을 기회로 여겨 이탈하기 보다는, 내가 느꼈던 과거의 감성적 의지를 다시금 다잡아 현재에 충실하고 목표한 것을 성취해내는 것이야말로 과학적 가설에 대한 태도와 같은 이성적 판단이라고 부를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커플의 성생활 패턴 데이터를 시각화한 전시물. 감성이 데이터(이성)를 만들어 내고 또 다른 감성을 만들어낸 재밌는 사례다. 음.. 이 글의 취지와 그리 상관없는 이상한 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그냥 한 번 올려보고 싶었던 나의 감성적 의지가 발현된 것 뿐이다 – 출처: BigBangDa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