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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회담과 하나님의 섭리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면서, 조회수가 몇 되지도 않는 인터넷 구석에 있는 개인 블로그이지만, 한마디 남겨야겠다 싶다.

어떤 이들은 정상회담과 그 성과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북한정권의 인권유린에 대한 묵인 또는 망각과 김정은 개인 또는 정권에 대한 미화 또는 나아가서는 북한정권 옹호로 연결시키는 것을 보면서, 속이터져 견딜 수가 없다. 극히 일부일 것으로 추정되는 극좌파 인간들에 해당하는 수많은 가정들을 연결하는 과감하고도 무모한 비약적 추론을 대체 왜 모든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대입시키는 것일까?

내가 만일 대통령이라면, 민족의 염원과 평화와 북한의 인권 문제를 위해서라도 김정은의 악행에 대해 속으로는 구역질을 할 지언정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웃음을 지어야만 했을게다. 두 얼굴의 김정은을 대면하며 평양냉면 맛있다고 한마디라도 건네주고 청와대로 돌아가서는 체해서 소화제를 먹어야 했을게다. 아니 준비하던 기간들을 포함해서 위장병이라도 났을 것 같다.

이번 정상회담이 북한정권을 옹호하는 일이며 북한의 인권유린을 부추기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김정은과 북한정권이 그러한 정권이니 날이면 날마다 각을 세우는 일이 고통받고 있는 동포들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오히려 김정은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어 지금보다는 나은 상태로 나아갈 방안을 찾고 합의해야 할 것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북에 쳐들어가 모조리 때려부수기라도 할텐가?

게다가 소위 말하는 우파 기독교인들(좌우 구분하고 싶지 않지만 그들이 정상회담을 찬성하는 기독교인들을 좌파로 통칭하는 것을 볼 때)은 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들 기독교인들을 영적으로 무지하여 자신도 모르게 북한정권을 옹호하는 경우 또는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는 일들을 자행하는 무리로까지 해석해버리는 일반화 오류의 극단을 보여준다.

나 자신조차도 수많은 생각이 뒤엉켜 그 생각이 어떤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되어 왔는지 분간조차 어렵고 부패한 본성으로 인해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오동작하기 십상인 연약한 존재일진데, 그들은 나의 의도와 생각을 명확하게 잘 판단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정확도의 딥러닝 분류기라도 탑재하고 있는 모양이다. 눈에 보이는 사건들 이면에 수많은 이해관계와 사건들이 조합되어 있다는 단순한 상식과, 그 사건들의 인과관계가 어떤 결과를 이끌어낼지 한 치 앞도 예상하기 어려운 사회 시스템 속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방식의 정치적 행태만이 선한 결과를 내는 하나님의 방식임을 주장하는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북한정권의 수많은 악행과 추태들에 대해 눈물흘리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은혜가 북한 땅에 풀어지도록 기도하는 일은 너무나 필요한 일이고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왜 그 기도와 열정이 북한 땅(북한 정권이 아닌)을 축복하는 일에 사용되지 않고 엄한 국내 기독교인들에 대한 판단과 비난으로 목에 핏대를 올리고 있는 것인지 진심으로 안타깝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그들의 사고 안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이러이러하게 흘러가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소위 보수 정권 때는 로마서 13장 1절을 들먹이며 권위에 순종하라고 주장하면서 ‘소위’ 진보 정권 때는 대통령 비난에 앞장서 있는 아이러니는 무엇인지. 주체사상이라는 비기독교적 사상에 대한 반감, 그리고 ‘거룩한 사명감’에 불타 있는 탓에 북한과 그를 둘러싼 정치·경제·사회적 역학 관계의 복잡성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도 그 잣대로 해석해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모든 갈등들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선을 이루시도록 기도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어린아이 같은 기도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 창세기 12:3

누구나 복을 좋아해서인지 교회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봤을 때 이 말씀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발견을 못한 것인지도), 불행하게도 나는 과거에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은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나를 저주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저주하시겠다는 무시무시한 말씀이, 은연 중에 과연 사랑의 하나님에게 걸맞는 약속인지에 대한 의문을 낳게 했던 것 같다. 그것이 나만의 의문이 아니었던지, 이 구절을 사용한 어떤 축복송에서는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는 쏙 빼놓기도 했다 (오래된 찬양이어서인지 악보도 음악도 찾기가 힘들다).

하나님은 왜 굳이 저주에 대한 말씀을 포함시키셨을까. 이 구절을 특별히 묵상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마음의 고통이 있는 시간을 지나는 동안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이 말씀이야말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구절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를 대신해 분노하시고 싸워주시는 하나님. 그렇지 않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분노하는 마음이 생기듯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만큼 더 크게 분노하신다는 사실이 내게 위로가 되고, 나의 고통에 비례해서 그 마음에 더 감동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이는 내가 오랫동안 제임스파울러의신앙발달단계에서소위우주적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기적이고 편협한 신앙으로 치부해왔던 다윗의 기도(나 자신은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면서도)를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나 자신의 고통과 비참함을 더 잘 인지하고 직면할수록 나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더 갈망하게 한다. 이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인간의 비참함으로부터 시작하는 것과도 맥이 닿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실상 이 구절의 비밀은 뒷부분에 있다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 표현은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마음이 내 원수를 ‘저주’하려고 눈을 부릅뜨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족속을 축복하기 원하신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족속들이 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발견하고 나를 축복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시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동시에 내가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함을 명령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이 구절은 사랑과 저주라는 모순의 실타래 속에서도 나와 인류를 향한 분명한 사랑을 드러내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강력한 영광과 통치를 강조하며, 내게 주어진 사명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매우 강렬한 말씀이다.

작년말에서야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어린아이와 같은 그리고 다윗과 같은 기도의 근거이기도 하다. 하나님 앞에서마저 고상한척 하고 있던 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나는 내 삶과 감정을 얼마나 하나님께 아뢰었는가. 그렇지 못했던 나의 태도야말로 불신을 반증하는 태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도한다. ‘하나님, 저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시고 저를 힘들게 하고 저주하는 자들을 벌해 주시되, 그것으로 인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드러나게 해주세요.’

진정한 행복이란 – 두번째 이야기

2017년 말미에 행복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고 나름 생각을 정리해가던 중 발견한 것은, 나는 지금까지 행복을 ‘녀석’이라고 지칭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행복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엇’이고, 이것은 나로 하여금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을 ‘소유’할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라 여겨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상 행복이란 것 자체가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 행복을 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대체물 내지는 상징을 소유함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암묵적인 추론을 하게 만들고, 내가 얻고 싶은 어떤 것을 그 대상으로 상정하여 적극적인 행복의 추구라는 허울 좋은 명목을 내세운 비정상적 집착이라는 부작용을 낳고야 말았다. 결국 그것을 얻으면 행복한 것이고, 얻지 못하거나 잃어버리면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주 전(2017년 12월 12일) 이후로는, 평소에 거부감을 갖는 기복적인 기도라는 생각에 피해 왔던, 나의 지극히 인간적이고 어린애 같은 초보적 기도라 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를 바탕을 두게 될 때 얼마나 큰 평안과 행복을 안겨주는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전의 기도야말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해달라’는 식의 고상한 척은 다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부끄러운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오히려 얻고 싶은 그 무언가의 소유 여부로 행복이 결정된다는 매우 기복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공식을 산정하고 있었음에도 깨닫지 못했던 셈이다. 대체 내가 무엇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어른인척 했단 말인가. 나를 위해 예비해두시고 구하면 주실 복들을 ‘저는 그런 것 필요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이면 족합니다’라고 아부해놓고는 뒤로 돌아서서 혼자 힘으로 바등대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다.

주절주절 늘어놓았지만, 결국 행복은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에서 오는 문제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면서, 이제는 나의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기도와 함께 기복적 관점이 아닌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2017년의 가장 큰 수확이 아닌가 싶다. 내 바람을 솔직하게 기도하되, 그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방식을 신뢰하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 것. 이것이야 말로 지금 내가 누리는 행복의 근원이요, 진정한 행복이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2:9)

번외로, 이것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과 닮아 있다는 결론도 덤으로 함께 얻게 되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집착으로 그 대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태도로부터 시작되고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결론이다. 사랑을 소유물로 여길 수록 그 대상인에 대한 집착과 비일관적인 감정의 동요(시작과 끝을 갖는)를 사랑이라 착각하게 만들지만, 하나님을 바라볼수록 그 사람을 지속적으로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캄보디아에서 교육선교를 하고 계신 목사님이, 무려 17년전에 말씀해주셨던 그 의미를 왜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인지 아쉽기 그지없다. 물론 이러한 이해와 실천은 또다른 장벽이 있을테지만, 2017년의 마지막에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실천할 수 있는 마음의 기반을 다지고 2018년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감사하고도 가슴 벅찬 일이다.